어느 마을에 사이 좋은 형제가 살고 있었어요. 그 형제에게는 누구에게도 없는 보물이 하나씩 있었지요. 첫째에게는 어디든지 원하는 곳을 다 볼 수 있는 망원경이 있었고, 둘째에게는 어디든지 원하는 곳을 갈 수 있는 양탄자가 있었으며, 막내에게는 먹으면 어떤 병이든 낫게 해주는 사과가 있었지요. 그러던 어느날, 첫째가 동생들에게 말했어요. "동생들아 내가 망원경으로 보니 저쪽 먼 나라 공주님께서 불치병에 걸려서 명의를 찾고 있다는구나. 그래서 누구라도 공주를 낫게 해주는 사람을 공주와 결혼을 시켜주고 큰 돈을 준대. 아파서 저렇게 고생하고 있는 공주님을 위해 우리가 가야 하지 않겠니?" 그랬더니 동생들은 흔쾌히 응하였고, 둘째는 바로 양탄자를 준비했어요. 그리고 그 나라에 도착한 형제는 막내가 가지고 있던 사과를 공주에게 먹여서 공주님을 낫게 해주었지요.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이었어요. 첫째는 내가 먼저 공주가 그런 어려운 상황에 처해있다는 걸 발견했으니 내 공이 가장 크다고 했고, 둘째는 내 양탄자가 아니었으면 어떻게 이렇게 먼 나라까지 올 수 있었느냐고 했고, 막내는 내 사과가 아니었으면 공주가 낫지 못 했을 거라고 했지요. 우리 사회에서 ‘헌신’에 대한 의미를 전달하기 위해 인용하고 있는 천일야화 속 이야기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이야기의 결말은 자기가 가진 것이 없어질 것을 알고도 공주를 위해 기꺼이 사과를 내어준 막내와 공주님이 결혼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아이들에게 들려준 후 결말은 들려주지 않고 이런 질문을 던져봤다."얘들아, 이들 중 누가 공주님과 결혼을 해야할까?"그러자 6세 아이가 이런 대답을 한다.**“결혼은 서로 행복 하기 위해서 하는 건데, 왜 공주님의 의견은 안 물어봐요?"**순간 멍해진다. 이게 우문현답인가 하는 생각도 든다. 필자는 현업에서 10여년간 조직 내 소통 업무를 담당해왔다. 그것을 위해 워크숍, 캠페인, 행사, 진단, 교육 등 많은 업무를 경험했다. 그러면서 깨달은 것 하나. 소통이란 사전적인 의미로 ‘뜻이 서로 통하여 오해가 없음’ 이지만 조직에서 행하는 소통에는 ‘서로’가 빠져있다는 것. 우리네 조직에서는 직원들에게 ‘상호 성장’이라는 달콤한 열매를 아니 달콤한 열매 이미지를 내보인다. 그리고 ‘함께’ 잘 해보자고 말한다. 그런데 서로 성장하자고 하면서 구성원들의 마음이나 인식은 어느 정도나 귀하게 여기고 있을까? 요즘은 그나마 많은 회사에서 구성원들의 마음과 인식을 알고자 조직문화 진단이라는 수단을 택한다. 아주대학교 김경일 교수의 강연 중 이런 말이 있었다. “19세기 들어오면서 자연과학이 급속도로 발전하기 시작합니다. 자연 과학이 발전했다는 것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현상을 숫자라는 단일 표기체로 표현하는 것이 가능해졌다는 거죠. 그러던 중 철학자 중 일부가 ‘사람의 마음도 숫자로 표현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을 합니다.” 조직문화 진단은 직원들의 마음과 인식을 숫자라는 단일 표기체로 표현한 데이터를 얻는 것이다. 그런데 이게 정말로 신뢰할 수 있는 결과일까? 내가 생각하는 5점의 강도와 다른 사람이 생각하는 5점 정도의 강도가 같지 않은데 표기하는 수단만 같은 게 어떤 의미를 줄 수 있을까? 결국 숫자는 편의를 위해 취하는 수단일 뿐 그것 자체가 의미가 되기는 어렵다. 응급실에서도 환자가 느끼는 통증이 1~10중 어느 정도에 해당하는지 묻고 난 후 정밀 검사를 또 하지 않던가? 진정으로 마음을 알고자 한다면, 목소리를 듣고 싶다면 숫자라는 표기체를 기반으로 알아가기 위한 활동이 필요할 것이다. 요즘 비대면이라는 새로운 업무 환경을 맞이하여 ‘ 소통 ’ 이라는 단어가 다시 떠오르고 있다 . 이에 필자는 조직에서 행하는 소통에 ‘ 서로 ’ 라는 단어를 호출하여 구성원들의 마음과 인식을 알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해볼 때가 아닌가 생각해본다 . 지성이면 감천이라 하지 않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