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 창고처럼 되어버린 장기 근속자를 위하여]
10년 넘게 다녔던 회사를 퇴사했을 때 느껴졌던 ‘시원 섭섭함’에서, ‘시원함’의 정체는 무엇이었는지를 떠올려봤습니다.
시원함의 정체는 조직을 퇴사하게된 여러가지 이유들을 포함해서, ‘기억 창고’로서의 기능을 내려놓게 된 것에서 기인하더라고요.
‘기억 창고’는 조직에서 해당 직무를 오래 수행해온 장기근속자를 일종의 ‘히스토리 관리용’으로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이 당시에 무엇이 문제길래 이렇게 했지?’
‘이 때는 대체 왜 (이런 비 합리적인 결정을) 이렇게 한거야?’
이런 질문들은 오래 그 조직에 있었던 장기근속자에게, 비수처럼 날아와서 탁 꽂힙니다.
왜냐하면, 그 질문에 대답할만큼 오래 근무했던 (그 당시에 근무하면서 곁눈질로라도 상황을 지켜봤던) 사람은 해당 조직의 장기 근속자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업무의 히스토리만 물어보면 다행입니다.
대체로 히스토리를 물어본다는건 ‘왜 그렇게 했어’라는 질문으로 이어지며 과거의 결정이나 업무를 부정하고 ‘잘못된 행동이었다’라는 것으로 귀결되는 경우가 많고,
그때마다 장기 근속자는 본인이 한 결정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심지어 업무담당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항상 그당시 ‘왜 그렇게 했냐’는 물음에 답변을 해야하는 상황에 자주 놓이게 됩니다.
조직에서는 책임자급인 리더들은 자주 변경되어도, 실무자가 장기 근속을 하고 있다면 원인을 파악하기 위해 일단 실무자를 찾아서 이야기하는게 편하다고 생각하게 되는것도 사실입니다.
그런데, 매번 그 ‘기억창고’역할을 하는 장기 근속자의 입장에서도 한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내가 회사에 오래 다녔다고 해서, 속한 조직의 모든 히스토리를 파악하고 그 내용을 일일이 확인해줄 의무는 없습니다.
더구나 과거에 어찌되었든 그 상황에서 이미 벌어진 일에 대해 ‘왜 그렇게 했냐’라는 비난이나 책임을 모두 감수해야할 이유도 없습니다.
오히려 이런 내용들이 장기근속의 의지를 꺾는 부분이지요.
‘내가 죄 지은것도 아닌데, 왜 이런 이야기를 들어야 하지?’
‘내가 오래 다녔다는 이유로 이렇게 추궁받을 일인가?’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거든요.
기억창고인 장기근속자를 대하는 조직의 태도를 보면, 주변 사람들도 장기근속했을때 조직이 나를 대하는 태도를 깨닫게 됩니다.
오래 다녀서 괴로움을 주는 회사로 보인다면, 괴롭기 전에 누구나 탈출하고 싶어지겠죠.
직원들의 짧은 근속이 고민이라면, 조직에서 장기근속자를 대하는 태도와 장기근속자들이 느끼는 조직에 대한 인식을 먼저 살펴보면 어떨까요?
장기 근속자는 기억창고로 함부로 대해도 되는 존재가 아닙니다.
가끔, 우리는 ‘그 사람은 다 알고있어’라는 믿음으로, 또는 편안함으로,
익숙하다는 이유로 장기 근속자에게 함부로 대하고 있는건 아닐지 생각해봐야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