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1.03
길쭉한 육각 막대 안의 꽉 찬 검정 동그라미.
단단한 연필처럼 우뚝 솟아 고유한 심지를 세웠습니다.
투명한 비닐에 쌓여 때묻지 않으니 근사하기 그지 없었지요.
그러던 어느 날, 세상에 굳건히 발 한번 디뎌 볼 용기를 내었어요.
하지만 중심을 잃어버려 이쪽 그리고 또 저쪽 넘어지고 말았어요.
또, 어두컴컴한 동굴에 갇혀 날카로운 칼에 베일 때도 있었답니다.
시커먼 가루 투성이가 되어 밖으로 나왔지만
깎여버린 그 날, 온 신경이 곤두서 매섭기만 했어요.
하지만 며칠이 지났을까 매서움은 스르르 잠들었어요.
곧게 뻗은 줄 위에, 하얀 들판에 요모조모 쓰이며 뭉뚝해져 갔지요.
시퍼렇게 섰던 날이었지만 끝엔 동글한 마음만이 남았습니다.
우리네 삶 역시 그래요.
온전히 태어나 세상을 맞으면
치인 아픔도 있지만, 또 쓰여 안기는 따뜻함도 있거든요.
그러다 언젠간 이내 몸통 짤막해지는 순간이 오겠지만
백지 위에 그려가는 인생이기에
꽤나 쓸모있는 흔적으로 남아있을 거에요.
그러니 오래오래 쓰여 남겨갑시다, 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