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이직러의 명과 암, 그리고 득과 실 이직을 고민 중이거나, 이직을 원하지만 두려운 사람을 위한 짧은 이야기 Pro-이직-(e)r가 되는 필요충분조건 나의 경우는 이랬다. 1) 필요조건 : 퇴사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벌어졌다. 그 시작은 경영난으로 인한 급여 미지급이었다. 사회초년생 꼬꼬마 시절, 쥐꼬리만한 월급이었지만 그마저도 반드시 꼬박꼬박 들어와야만 했다. 월급이 밀리면, 월세도 밀렸고, 카드값도 밀리는 연쇄 도산의 도미노가 시작될 수밖에 없었으니까. 이러한 회사의 재정난을 1년 단위로 두 번 연달아 겪게 되면서, 1년 단위 이직 루틴이 시작됐다. 나는 지방 출신으로 대학 입학을 계기로 상경한 케이스다. 2) 충분조건 : 강렬한 성공 효과를 맛봤다. 이직을 했을 뿐인데, 급여가 껑충 올랐다. 불가피한 퇴사로 재정적 패닉에 빠져들 때 즈음. 한 광고대행사에서 합격 연락을 해왔다. 합격도 감지덕지인데 연봉 협상에서 예상 밖의 거한 금액을 쿨하게 제시했다. 왜요? 제가요? 정말요? 야근 잦고 일 많은 광고대행사 특성을 몰랐던 숫배기는 그렇게 강렬한 돈맛을 보고 말았다. 그리고 이듬해, 경영난으로 정리해고 바람이 불고 급여 20% 감축안의 실행이 가시화되었을 때, 나는 더 큰 연봉을 제안받고 B2B 인하우스 마케터로 이직했다. 명(明) 그리고 득(得) ✅ 넓고도 쓸만한 능력 탑재 13년간 9개 기업을 거쳤다. 인하우스 마케터부터 사보대행사, 광고대행사를 모두 경험했다. 양쪽을 다 알게 되니 클라이언트의 입장, 대행사 상황을 더 잘 이해했고 협업 시 훨씬 능률적으로 임할 수 있었다. B2C와 B2B, 대기업 브랜드부터 스타트업 브랜드 등 브랜드의 양극단을 맛봤고 브랜드 런칭부터 리브랜딩까지 기업 브랜드가 처한 다양한 상황을 경험할 수 있었다. 교육, 패션, 금융, 축산, SaaS, AI 솔루션까지 섭렵한 산업군도 다양했다. 이직할 때 분야나 업종에 대한 거부감이나 두려움이 사라졌다. 어떤 프로덕트도 마케팅할 수 있게 됐다. ✅ 아이디어 변주 각 회사마다 히트 친 캠페인과 실패한 캠페인이 있었다. 성공과 실패의 밑거름은 변형과 진화를 가능케 했다. 업종은 달라도 여전히 통하는 성공 공식이 존재했고, SEO 최적화나 광고, SNS 채널 운영에 대한 노하우는 갈수록 깊어졌다. 한 회사에 오래 몸 담은 동료는 오히려 혁신적 아이디어를 제안하는 것에 부담을 느끼고 익숙한 업무만 고집하는 경우가 많았다. ✅ 적응력과 안목의 동반 상승 프로이직러들은 공통적으로 빠르게 조직에 적응한다. 웬만큼 특이한 회사가 아닌 다음에야 사내 분위기는 대부분 비슷비슷하다. (여러 번 반복해서 숙달된 측면도 있다.) 게다가 면접에서 부서장과 동료를 만날 수 있고, 그때 성격이나 성향이 서로 맞을지 아닐지 어느 정도 판가름 나기 때문에 환영받는 분위기 속에서 누구보다 빠르게 적응하게 된다. 아주 이따금 면접에서는 죽이 잘 맞았는데 막상 입사해서 서로 실망하는 경우가 있는데, 나는 9개 기업에서 8번, 순탄하게 정규직으로 전환됐다. 이직을 자주 하다 보면 회사를 보는 안목도 높아진다. 처음에는 돈을 좇다가 갈수록 전 직장의 문제나 불만을 해소하는 회사로 옮기게 된다. 복지 제도나 환경도 돈만큼 중요한 요소라는 것을 체득하게 되기 때문이다. 좋은 회사로 이직하면 일잘러들을 많이 만날 수 있기도 하다. 나와 결이 같은 사람을 만나기는 쉽지 않아도 부서마다 1명씩 에이스는 꼭 있다. 그들과 함께 협업하는 경험도 나의 자산이 된다. 암(暗) 그리고 실(失) 프로이직러 생활은 한계가 있다. 너무 자주 계속 연달아 이직을 반복할 수 없다. 영미권에서는 프로이직러가 풀쩍 풀쩍 뛰어다니는 메뚜기를 닮았다며 잡호퍼(job hopper)라고 부른다. 일명 한철 메뚜기. 아무리 매력적이라도 HR 입장에선 거르고 싶은 부류다. 필자도 마지막 이직(= 현 직장)이 가장 어려웠다. 면접을 볼 때도 그간 쌓은 화려한 경력은 쉽게 인정받았지만, 장기 근속과 관련해서는 숱한 다짐과 결심 가득한 말로 면접관을 어렵게 설득해야 했다. 최종 면접에 올랐던 5개 회사 중 1곳에서는 3년 이내 퇴사 시 성과금을 반환하는 약정서를 쓸 수 있냐고 묻기도 했다. (쓸 수 있다고 답했지만 이 회사를 가지는 않았다.) 업종에 따라 제품을 이해하고 숙달하는 데만 오랜 시간이 걸리는 경우가 있고, 특히 B2B에서는 마케팅이 장기 프로젝트로 진행된다. B2B에서는 1년도 짧다. 1년 단위 이직이 많았던 잡호퍼로써 주제 넘은 조언일 수 있지만, 이직의 필수조건이 발동하지 않는 한 최소 3년의 성과를 커리어로 가져가는 것이 이상적이라고 말하고 싶다. 3년 단위의 이직러라면 커리어노마드(Career nomad)라는 꽤 점잖은 호칭으로 어디를 가든 큰 환영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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