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아스뚜리아노스 Asturianos ~ 리께호Requejo : 27km
밤새 비가 왔다. 다행히 아침이 되니 그쳤다. 아침에 한국에 친구들과 문자를 주고 받고 집에도 이것저것 이야기를 하려는데 산 지역이라 통신 상태가 좋지 않았다. 오른쪽 무릎이 좀 부어서 이걸 어쩌나 하다가 오늘은 뿌에블라 데 사나브리아 Puebla de Sanabria에 묵어야지 했다. 큰 도시인데 또 알베르게가 닫았을까?
사바브레스 길은 너무 아름다웠다. 산맥들과 함께 눈이 덥혀있어서 사진 찍느라 정신 이 없었다. 인근은 또 포르투갈 국경이다. 빨라시오스 데 사나브리아Palacios de Sanabria, 레메살Remesal, 뜨리우페Triufe 등 작은 마을을 차례로 지나 왔다. 중간에 사슴 발자국과 어제와 오늘 먼지 지나간 순례자 친구들의 발자국을 보면서 걸었다.
한번은 정말 큰 개 발자국이 있어서 사진을 찍는데, 세상에! 사슴이 두 마리나 나타나 길을 훅 가로질러가더니 멀리 서서 나를 한참 쳐다본다. 시간이 잠시 멈춘 듯 아름다운 순간이었다. 한참을 사슴과 나는 그대로 서서 서로를 바라 봤는데 이내 사슴은 우아하게 내 시야에서 멀어져갔다. 야생에 자유로이 사는 사슴의 발자국 소리도 달리는 모습도 신비한 기억으로 나에게 새겨졌다. 어제는 엉덩이 털이 하얀 토끼들이 뛰어가더니 오늘은 사슴이다. 자연은 아름답고 신비한 아우라로 마음에 묘한 기쁨을 일어나게 한다. 까미노에서 경험할 수 있는 또 다른 선물이다.
뜨리우페Triufe의 한 까사 데 루랄Casa de Rural(시골민박집)의 문 앞에 부엔 까미노라는 글자와 함께 사탕이 놓여 있었다. 중간에 마을은 있었는데 바가 없어서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지나오는 지라 감사하게 사탕을 챙겼다. 뿌에블라 데 사나브리아에 거의 도착하려면 한 시간 반 정도는 더 걸어야 한다. 뜨리우페의 마을을 나오며 언덕에 신호가 잘 터져서 발을 식히며 어머니랑 겨우 통화가 되어 잘 걷고 있다고 말했다.
오늘은 무릎 상태도 그러하니 뿌에블라 데 사나브리아에 묵으리라! 그런데 웬걸 마을에 도착하는 것도 꽤 오래 걸렸다. 지형이 제법 오르락내리락인 데다가 새로 생긴 주거지 쪽은 테라 강을 사이에 두고 오르막길이 구시가지와 나뉘어 있었다. 성과 언덕, 테라 강이 아주 인상적이었다. 그래서 관광지라 모든 게 다 비쌌다.
마을 입구에 센트로 데 살룻Centro de Salut(보건소)이 열려 있길래 들어가서 무릎이 아프다고 진료를 받을 수 있냐고 물어봤더니, 스페인 건강보험증이나 유럽인이 아니면 진료가 힘들다며 난감해 했다. 알았다고 하고 일어나려니 도움이 못 되서 미안한지 나에게 그 통증 때문에 먹는 약이라도 있는지 물어보더니 이부프로펜 600mg을 아침저녁으로 먹으라고 알려준다. 내가 알기론 스페인은 의료 시스템이 이런 건 무료라고 알고 있는데 아예 진료 거부라니 뭐 그럴 수 있지 하고 나왔다. 그냥 경험상 들러 본 거니까.
마을에 들어서며 복잡한 길 때문에 까미노 표식을 찾기가 정말 힘들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알베르게가 2월 말까지 닫았다고 또 호기롭게 종이를 붙여놓았다. 어쩌라고! 아까 길을 지나올 때 까사 데 루랄 전화번호라도 알아 놓을 걸 그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구시가지 쪽으로 올라가 인포메이션 센터에 물어보려고 했으나 5시까지 닫는단다. 지금이 오후 3시인데 맥주를 한잔하고 숙박 문제를 풀려고 했지만 시에스타 끝에도 열지 않는 가게들이 많아 그마저도 힘들었다. 혹시나 해서 안드레스에게 문자를 보냈다. 그는 어제 진료를 받으러 여기로 왔을 테니 그가 더 잘 알지도 모른다. 이 지역의 숙박시설은 호텔도 아니고 호스텔인데도 가격이 꽤 비쌌다. 게다가 관광 도시라 순례자를 보는 시선이 그닥 달갑지 않다. 나는 그냥 다음 마을을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벌써 오후 4시인데 다음 마을까지는 12km정도를 더 걸어가야 한다. 어여 서둘러야 했다. 이 마을은 정말 까미노 표시를 찾기가 힘들었다. 까미노 표시가 잘 된 곳과 아닌 곳은 순례자에 대한 친근도가 좀 다르다는 느낌이 들었다. 암튼 경찰서가 있어서 퇴근하는 경찰에게 물어보니 저쪽 고속도로 쪽으로 가야한다고 오리지널 길은 공사 중이라고 했다.
도로를 따라 쭉 마을을 나와 잠깐 강가 길을 걷다가 다시 도로를 쭉 걸어갔다. 길은 평지라 어렵지 않았지만 늦은 시간이라 또 막 정신없이 걸었다. 오후 6시 반이 되어서야 길게 뻗은 소나무 숲을 지나 리께호Requejo에 도착했다. 공립 알베르게Municipal albergue와 사설 알베르게가 다행히 다 열었다. 더 걸어온 보람이 있다. 나는 구청에서 하는 알베르게로 갔다. 내가 길을 묻고 다니니 알베르게 아주머니가 열쇠를 가지고 오고 계셨다. 그녀는 내일 길에 대해 자세히 설명도 해주더니 도장으로 꽉차가는 나의 크리덴셜(순례자 여권)을 위해 까미노 사나브레스용 크리덴셜을 찾아와 나에게 그냥 주었다. 오! 여기도 천사가 있다.
까미노 사나브레스는 이탈이라인 호스피탈레로 발터가 이야기해 준대로 정말 경치는 아름답다. 그런데 겨울이고 드문 순례길이라 참 외롭다. 3월쯤 시작 하면 좋을 듯하다. 모든 것이 파릇파릇 살아나는 아름다운 경치들이 있을 것 같다.
샤워를 하고 딱 두 개의 레스토랑이 있다는 이 작은 마을에서 한 곳을 골라 저녁을 먹고 기절하듯이 잠들었다.
내일도 부엔 까미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