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체화라 하더라도 가령 은유를 이해하지 못하는 어린아이를 가르칠 때에는 오히려 유용하다. 물론 아이들은 이를 구체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는 성향이 있다는 게 문제이긴 하다. 사람은 그 발달 과정에서 특정한 시점에 도달하면 이런 어린 시절의 구체화들을 다시 깨뜨려야만 한다. 여러분은 그것들을 없앨 수 없으니, 이는 구체적인 것으로 받아들인 상징들이 여러분 속에 깊숙이 박혀 있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이미 내면화되었고, 단순히 없애 버릴 수는 없다. 따라서 다시 한 번 읽어야 한다. 내 경험에서 하는 말이다. 나는 스물다섯 살이 도리 때까지 기독교를 구체적인 것으로 받아들ㄹ였다. 그리고 솔직히 나는 그토록 풍부한 상징에 일찍이 노출되었다는 것에 대해 오히려 감사해야만 할 것이다. 하지만 그 종교를 포기함으로써, 그 너머로 나아감으로써 얻게 되는 어떤 강력한 힘도 있게 마련이다. 여러분이 정말로 그렇게 한다면 말이다. 이는 단순히 '내던진다'는 것과는 다른 이야기다. 하지만 여러분이 만약 이를 숙고해 본다면 - 즉 여러분이 만약 그 상징들의 의미를 사실로 받아들이는 대신 은유로 읽는 방법을 배운다면 - 다시 말해서 여러분이 왜 나왔는지를 알고 있다면, 그것은 강력한 힘의 원천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일단 벗어나면, 여러분은 반드시 자신의 성스러운 장소를 만들어야만 한다. (중략) 일상적인 삶의 맥락에서 벗어날 수 있는 공간이라면 무엇이든지 성스러운 공간이 될 수 있다. 세속적인 맥락에서 우리는 대립자의 쌍들 - 가령 원인과 결과, 득과 실 등등 - 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중략) 여러분의 성스러운 공간은 여러분이 자신의 모습을 거듭거듭 찾을 수 있는 장소다. 여러분이 진정으로 성스러운 공간이라든지, 피난처를 지니려 한다면, 그곳은 우선 황무지가 아니어야 하며, 암브로시아 - 외부로부터 여러분 안에 불어넣는 기뿐이 아니라, 여러분의 내부로부터 나오는 기쁨 - 의 샘이 있는 어떤 활동 공간, 즉 여러분이 자신의 의자와 자신의 의도와 자신의 소망을 경험할 수 있는 공간이 됨으로써, 비록 작더라도 하늘나라가 거기 있어야 한다. 내 생각에 모든 사람은 - 본인이야 알건 모르건 간에 - 그런 공간을 필요로 한다. https://noez.tistory.com/36 +) 요가는 해본 적이 없으니 내 머릿속에서는 비슷한 카테고리에 함께 있는 명상을 떠올리면서 이해했다. 스무살 때 들었던 불교 수업에서 하루 종일 명상을 실습해본 적이 있는데 그때 배운 방법은 눈을 감고 누워서 정수리부터 시작해 내 몸에 테두리를 천천히 그리는 식이었다. 중간에 분심이 들었다는 걸 인지하면 다시 정수리로 돌아가서 새로 시작하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도 특별한 생각을 하지 않고 진행하는 게 핵심이었던 것 같다. 쉽게 높아지고 쉽게 낮아지는 마음이 어떤 대상을 오해 없이 바라보는 데는 도움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바람에 흔들리는 그 순간이 특별한 기억이고 설렘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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