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ttached to post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시기 “어…? 하나가 더 있네요?” 내 인생에 쌍둥이를 가질 거라고 한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그런데 처음 검사를 하러 갔을때 쌍둥이라는 사실을 알고 잠깐의 어이없음을 느꼈었다. 그리고 쌍둥이는 예정일을 한참 앞선 7개월차에 일찍 나오려고 했다. 이른둥이는 건강에 치명적일 수 있기 때문에 그날로 와이프는 분만실로 입원해야 했다. 일반 입원실이 아니라 매일 산모들이 비명을 지르는 수술실이자 응급실이었다. 그렇게 불안한 분만실에서 한달을 보냈다. 와이프는 화장실도 가기 힘들 정도로 누워만 있어야 했고 분만 지연 링거를 맞고 지냈다. 나는 그 분만실로 한달 내내 출퇴근을 하면서 같이 지냈고 집에는 4살짜리 딸이 할머니와 같이 지내고 있었다. 한참 창업을 해서 2년차에 있었기 때문에 정말 치열하게 일을 하고 있었던 차였다. 회사가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 해서 투자자도 그만하는 게 낫지 않겠냐고 할 정도였다. 어떻게든 잘 하고 싶어서 분만실에서 코딩을 하면서 일을 했던 기억이 난다. 회사도 잘 될지 기약이 없었고, 언제 나올지 모르는 쌍둥이가 정상일 거라는 보장도 없었다. 육체적으로 힘든 것보다 정신적으로 더 힘들었다. 한달을 겨우겨우 버티다가 쌍둥이는 8개월을 채우고 나왔다. 8개월도 위험한 시기였기 때문에 애들은 바로 인큐베이터로 들어갔다. 이전까지는 몰랐는데 인큐베이터는 신생아를 위한 응급실에 있다. 태어난 아이들을 확인하러 가는데 병원에서 애들이 정상인지 아닌지를 알려주지 않았다. 애들을 보러 신생아 응급실을 들어가는데 두려운 마음에 현기증이 나서 쓰러질 뻔 했다. 다행히 애들과 산모 모두 건강했다. 그 후로 한달 동안 쌍둥이가 신생아 응급실에서 지내야 해서, 나는 출퇴근을 그 쪽으로 하면서 애들을 살폈다. 응급실에서 아프고 수술한 다른 아이들을 보는데 마음이 좋지 않았다. 우리 애들도 중간에 위험한 순간들이 있었지만 그래도 잘 퇴원을 할 수 있었다. 창업한 회사도 어려운 시기를 잘 극복하고 다시 성장하게 되었다. 그 이후로 힘든 일을 겪으면 그 때를 떠올리면서 아무리 힘들어도 그 때보다는 안 힘들다는 생각을 한다. 여전히 남자 쌍둥이를 키우는 게 얼마나 힘든지, 쌍둥이를 잠깐 학원에 보내놓고 있으면 참 아늑하다는 농담을 와이프와 나누곤 한다.
콘텐츠를 더 읽고 싶다면?
원티드에 가입해 주세요.
로그인 후 모든 글을 볼 수 있습니다.
댓글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