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T야?"라는 말을 자주 듣나요? 일상에서야 농담처럼 받아들일 수 있지만, 일을 할 때는 공감 능력도 중요한 역량이기에 그냥 무시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T지만, F인척을 해보기도 하는데요. 이런 사람에게 도움이 될 <전략적으로 공감하는 방법>을 소개합니다. 🍉공감 말고, 염려하기 첫째, 우리는 공감의 현장에서 우리의 공감이 그저 걱정과 괴로움으로 치환되는 보통의 과정을 그보다 좀 더 성숙한 ‘염려’로 연결해야 한다. 괴로움, 걱정은 정서적 공감에서 생기는 자연스러운 결과로 다른 사람의 고통을 직간접적으로 떠안음으로써 그 사람과 같은 감정을 느끼는 것이다. 반면 염려는 누군가의 감정을 이해하고 그들의 안녕이 향상되기를 원하는 마음이다. 이는 불교에서 말하는 자비, ‘타인의 고통을 떠안지 않으면서도 그들을 염려하는’ 의미와도 맞닿아 있다. 염려/자비와 걱정/괴로움은 매우 밀접해 보이지만 전문가에 따르면 그 두 영역이 항상 함께 하는 것은 아니다. 둘은 아주 약하게 연관되어 있을 뿐이다. 깊은 괴로움을 경험하는 사람이 반드시 깊이 염려하는 것은 아니며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두 상태는 유발하는 행동도 서로 다르다. 쉽게 괴로움에 빠지는 사람은 타인의 고통을 회피한다. 예컨대 자신을 감정적으로 힘든 상황에 빠뜨릴 수 있는 것은 가능한 외면한다. 괴로워하기보다 염려하는 편인 사람은 그렇지 않다. 괴로움에서 한 발자국 떨어져서 염려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본질적인 감정에 맞서려 하거나 혹은 그에 휩쓸리는 것이 아니라 감정에 ‘협력’할 수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우리가 우리 스스로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 주의를 기울여 파악해야 한다. 심리학자들은 자신의 감정을 정확히 구분하고 인지하는 이런 능력을 ‘감정 세분화emotional granularity’라고 부른다. 존 가트맨에 따르면 감정 세분화는 감정 관리, 자비, 연민, 마음 챙김 부분에서 다뤘듯 우리가 감정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고 스스로 진단하며 세분화해 이름을 붙여보는 연습을 통해 강화할 수 있다. 🍊효율적 이타주의로 공감 승화하기 둘째는 공감을 ‘효율적 이타주의’로 승화시키려 노력하는 것이다. 백혈병 진단을 받고 3년 째 항암 치료를 하며 투병 중인 다섯 살 소년 마일스 스콧의 소원은 ‘배트키드가 되는 것’이다. 이 이야기를 들은 비영리 기관 메이크어위시 재단은 이 아이의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 대대적인 이벤트를 마련한다. 이 이벤트는 세계적으로 화제가 되며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주었다. 그런데 어린이의 소원 한 건당 들어가는 평균 비용이 약 7500달러(약 840만 원)이다. 윤리학자 피터 싱어는 여기서 묻는다. 한 어린이의 소원을 들어주는 것과 한 생명을 구하는 것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하면 우리는 두말할 나위 없이 생명을 선택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 돈은 말라리아 예방에 써서 최소한 어린이 세 명 또는 그보다 많은 생명을 구하는 것이 더 좋은 일 아닌가? 우리의 이타적 행위가 실제로 좋은 결과로 이어지려면, 우리는 각자 할 수 있는 한에서 선善을 최대화할 방법을 합리적으로 강구해야 한다. 피터 싱어가 들려주는 배트키드 이야기는 직관적 공감에 따른 따듯한 기부가 반드시 최선의 결과를 가져오는 일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진정 더 나은 조직, 사회를 원한다면 우리는 공감하되, 균형 잡힌 공감을 해야 한다. 단지 ‘정서적 공감’, 동정심만으로 행하는 대신 실질적으로 무엇이 내가 속한 조직 혹은 사회에 좋은 결과를 가져올지 숙고하는 태도를 싱어는 ‘효율적 이타주의effective altruism’이라 이름 붙였다. 미래학자 아리 발라흐는 비즈니스 컨설턴트로 일하는 동안 고객들이 점점 더 단기적인 것에 초점을 맞춘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단기적 사고가 언제나 비합리적인 것은 아니다. 불확실성이 높은 현실 속에서 현재에 집중하는 것은 새로운 경영의 패러다임과도 맞닿아 있다. 그러나 그것만 봐서는 곤란하다. 특히 우리 미래의 안녕에 대해서는 더더욱 그렇다. 폴 블룸은 공감이 지금, 여기에 고정된 것이기 때문에 미래에 대한 우리의 공감을 반대로 막는다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공감은 시간, 상황에 따라 때때로 “편파적이고, 수치가 중요한 상황에서도 계산을 못하고 무시해 버리며, 우리의 시야를 좁게 만든다.” 그는 다시 질문한다. “자기 손가락을 잃는 것과 저 옆 나라의 수천 명이 죽는 것 중 우리는 어떤 것에 더 공감하는가?” 당연히 자신의 손가락이다. 일련의 맥락에서 그는 (잘못된) 공감이 선행을 추구하는 동기로 사용될 때나 옳고 그름을 가려서 행동하는 기준이 될 때 오히려 그 결과는 나쁠 수 있다고 강조한다. 우리는 단지 우리의 선천적인 공감에 기대어 더 나은 의사결정과 협력, 나아가 더 나은 조직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한걸음 물러나 장기적인 관점에서, 그리고 의식적으로 ‘공감’에 대해 다시 생각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공감이 때로는 편파적이고 단편적이고 단기적일 수 있다는 것을 알아차려야 한다. 공감의 과학이 우리에게 전하는 사실은, 공감에도 전략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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