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3.07 -개인과 사회, 융합적 공리주의 인간의 노동력은 최대 효율을 내기엔 한계가 있어 기계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기계의 발전은 곧 산업의 발달을 이끌었고 자본주의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주체적으로 사고하는 개인들의 사고 역시 발달했지만 자본주의라는 제도 하에 이윤을 추구하는 세력이 늘어나며 빈부 격차 문제도 뒤따랐다. 이를 개선하고자 등장한 것이 공리주의다. 공리주의는 사적 이익보다 우선하는 것을 공적 이익이라 보았다. 다시 말해 지극히 개인적인 이익이 아닌 최대 다수의 행복이라는 명제를 새긴 것이다. 효용성을 내포한 공리주의는 사실 자칫하면 기득권의 합리화 도구로 사용되기에 쉬웠다. 최대한 많은 이들의 행복을 위해서는 적은 이들이 희생을 일정 부분 감내해야만 한다는 뭐 그런 것 말이다. 하지만 모든 것은 시각에 따라 긍정과 부정, 양면성을 지니고 있기에 좋은 점도 있었다. 공리주의가 오용되면 문제가 될 수 있지만 선한 것으로서 바라보면 '누구나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다'는 기분 좋은 전제를 포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경험과 근거 그리고 감각에 의한 구체적 사실을 중시했던 경험론은 그렇게 공리주의를 탄생하게 했다. 감각의 동물인 인간은 경험할 수 있는 존재이기에 누구나 그 행복을 누릴 권리가 있다고 본 것이다. 그리고 또 공리주의는 양적 공리주의 혹은 질적 공리주의를 두고 벤담과 밀이 서로 다른 시각을 두고 있지만 사실 그렇게 구분할 필요가 있을까 싶다. 중요한 것은 효용과 효율, 그리고 실용성을 판단하는 주체가 '개인'이라는 점에 있다. 선한 개인 말이다. 개인은 자기 분수에 넘쳐나는 것을 넘보는 쾌락과 탐욕을 맛보면 이기주의에 젖어 부패한 만행을 저지른다. 그렇기에 적정선을 항상 유지할 수 있도록 사회의 기틀이 마련되어야 한다. 사회는 사회의 공리주의를 지켜낼 줄 알아야 하고 개인은 사회의 틀 내에서 전체적인 공리주의는 해치지 않으며 개인의 이익을 조금씩 추구하며 기쁘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말이다. 개인이 끝없는 욕망과 욕심, 허례허식으로 사회의 이익을 장악해 버리는 것은 이러한 더러운 행위를 컨트롤할 수 있는 사회의 바리케이드가 없기 때문이며 허영으로 충만한 주체들이 하나 둘 모여 카르텔을 형성해 상위 권력을 석권하기 때문이다. 인간이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은 절대적으로 비난받을 일이 아니지만 지나치면 항상 문제가 생기기 마련이다. 그런 문화가, 그런 행동과 사고가 괜찮은 것이라는 혹은 합리적인 것이라는 '웃어 넘기기' 권법을 답습하게 되며 대물림 되기 때문이다. 윗 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은 법인데 위의 고인 물은 썩은 물이 되었고 그 물이 꽁꽁 얼어버리면 그 아래의 맑은 물줄기와 흐름은 위를 뚫어내기 위해 더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투자해야만 한다. 윗 물이 고여 썩지 않도록 적절한 필터를 설치해 걸러낼 수 있어야 하며 그렇게 순환되며 흘러갈 수 있도록 장치를 마련해 두어야 새로운 갈래를 형성할 수 있다. 그것이 사회의 몫이며 그 사회가 제 역할과 책임 그리고 의무를 다 해낼 때 많은 이들이 행복이라는 효용을 누리며 공생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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