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3.05 -생각하는 내가 있을 뿐이다. 고대 그리스 시대를 지나 중세 유럽으로 들어서니 이 교회라는 것이 당대를 제패하고 있었다. 철저한 패권 하에 부패로 찌든 세속적 성직자와 이에 반하는 그 외 무리가 양립하며 긴장과 갈등을 거듭했고, 덕분인지 탓인지는 모르겠으나 점진적을 발전을 이루고는 있었다. 정치야 이쪽저쪽 팽팽한 신경전을 벌이고 있었으나 지식은 말할 필요도 없이 교회의 손바닥 안에 있었다. 모든 서적이 수도원에 보관되며 혹여나 그들의 입맛에 맞지 않으면 얄짤없이 금서 목록행이었다. 그들이 정한 사상과 사고가 곧 법이었으며 그 외의 것은 전면 부정당하곤 했다. 중세 시대의 신학과 철학은 인간 따위가 고귀한 진리를 알 수 없다 여겼다. 이는 신의 영역이었으며 절대자인 신의 은총을 입어 알 수 있는 것이었기에 인간은 한계에 봉착한 존재에 불과했다. 교회가 곧 권력이자 신이 그 세상이었다. 이에 데카르트는 작지만 강한 반기를 든다. 당차게 책상 위에 올라서서 '동의할 수 없습니다!'하지는 못했다. 동료들이 종교적 재판에서 유죄판결을 받았다는 소식을 들어서였다. 어찌 보면 데카르트가 새가슴을 한 쫄보가 아니었을까 했지만 또 시각을 달리하면 그의 사상과 이념을 이어가는 것이 더 중요했기에 주위를 살피며 가늘고 길게 행동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다시 돌아가 데카르트는 지식은 독점할 수 없는 것이라 말했다. 그는 어떠한 대상을 인식하는 데의 전제조건을 '의심'으로 삼았다. 의심에 의심을 거듭하는 방법론적 회의를 통해 확실한 것에 도달하는 것이 바로 학문의 시작임을 주장했다. 여기서 의심은 불신에서 피어나는 그런 부정성을 띤 것이 아님을 짚고 가야 한다. 의심은 '질문'임을 데카르트는 설파한다. 그리고 그 의심의 주체는 철저히 '나 자신'이 된다. 내가 하는 의심에는 어느 것도 개입될 수 없으며 억압받을 수도 없다. 모든 진리는 나에게서 기인하는 것이며 이 진리가 곧 내가 되어간다. 즉 합리적 의심과 질문을 통해 생각하며, 끝에 있는 원리와 답을 자유로이 찾아가는 개인이 곧 '나'이며 이것이 곧 나의 자아이다. 지금 우리의 사회는 생각하지 못하는 병에 걸렸다. 생각을 답습하여 살아간다. 토너먼트 전에서 승리한 지식만이 살아남고 이를 절대적 법칙이라 여기며 배우고 습득하거나 암기하기에 바쁘다. 하지만 세상은 너무나도 가변적이며 제멋대로다. 정해진 형태는 역시 없으며 또 시도 때도 없이 바뀐다. 그렇기에 그 법칙이 만사통용일 수가 없는 것이다. 만약 예기치 못한 상황이 발생했는데 나에게 문제 해결의 카드가 단 3개밖에 없다면? 이 3개로 상황을 헤쳐나갈 수 없다면 우리는 보통 좌절감과 패배감에 꺾여 극단적 비관론자가 된다. 생각하지 않고 생각하지도 못한다. 지식은 적절한 융합과 가감으로 밀도를 더해가는 것이다. 3개의 카드가 있다면 이를 굴리고 던지고 찢고 붙여 다양하게 조합해 새로운 것으로 변형해야 한다. 그래서 생각해야만 하는 것이다. 내가 이끌리는 곳이 과연 옳은 길인지, 내가 진정으로 얻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나의 호와 불호는 무엇이기에 이러한 결정에 다다랐는지 합리적으로 사고하고 의심하지 않으면 어떠한 곳에서도 자유로이 날 수 없다. 자유는 방법론적 질문과 자체 검열로 끊임없이 파고들며 원리를 찾아내고 확실성에 도달하는 순간 쟁취할 수 있는 것이다. 고로 우리는 지독하게 생각해야 하며 생각해야만 나의 원리 그리고 내가 있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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