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기예나Guillena ~ 가스띨블랑꼬 데 로스 아료요스 Castilblanco de los Arroyos:19.5Km
기예나를 빠져 나오면서 커피를 한 잔 했다. 오늘도 무슨 배짱으로 나는 오전 11시에 출발했는지 모르겠다. 나는 아침보다 저녁에 정신이 맑아지는 저녁형 인간이다. 나중에 느낀거지만 기예나에서 커피 안 마셨다면 큰일 날 뻔했다. 중간에 커피마실 까페들이 시에스타Siesta(점심 낮잠시간) 시간에 걸려서 대부분 닫아 있었기 때문이다. 안달루시아 지역에는 올리브 농장이 많다. 여름에는 47도 까지 기온이 올라간다. 여름에 은의 길을 웬만하면 하지 말라고 하는 것도 높은 기온으로 열사병에 걸려 사고 당한 순례자들이 많기 때문이다. 시에스타가 일반화 된 것도 가장 더운 시간에 쉬고 다른 시간에 일을 하기 위함이다. 24시간이 모자란 한국인의 생활 경험으로는 이런 시세스타로 오후 5시까지 문들 닫는 은행이나 관공서를 만났을 때의 당혹감이 있었는데, 또 지나보면 적응된다.
안달루시아 지역의 올리브 농장과 오렌지농장을 가로지르며 소가 노니는 들판과 풀고 크고 작은 바위가 있는 언덕을 하루 종일 지났다.
은의 길은 중세 로마인이 만든 도로로 은을 실어다 날라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그 길을 따라 산띠아고 까지 걸어간다. 로마가 유럽 대륙을 정복할 때 군인이 지역을 정복하면 그 뒤로 건축가와 엔지니어 그리고 일꾼들이 그 정복된 지역에 도로를 지었다. 정복된 지역의 물자공급을 원활하게 하면서 장기 통치를 가능하게 했다고 한다. 은의 길은 로마인의 위대한 기술력을 확인하는 길이다. 한국과 낯선 지형의 길과 작은 정원에 레몬이 주렁주렁 달린 나무를 구경하며 마침내 오늘의 숙소에 도착했다. 발에는 어제 만개하기 시작해 오늘의 다시 만들어진 물집이 나를 괴롭혔다. 스페인 순례자 호르헤가 나에게 물집 치료법을 알려주었다.
"잘 돌보면 모든 건 낫게 된다." 발에 소독약을 바르고 밴드를 붙였다.
오늘은 다행히 비가 많이 오지 않았다. 비가 왔으면 정말 힘들었을 길이었다. 다섯 시쯤 장을 보고 마침내 카레를 하고 이야기를 나누다가 잠자리에 들었다 아홉시 오십분...
이제 막 까미노의 시작이라 몸이 너무 힘들었다. 까미노 프랑세스를 완주했던 예전 기억으로 이십 키로미터를 너무 가볍게 생각한 듯하다. 한번 해봤다고 약간의 교만이 있었던 것 같다. 이제 시작인데 말이다. 까미노 프랑세스를 걸을 때는 처음이라 다음 코스에 오후 다섯 시까지 도착하지 못하면 큰일 나는 줄 알고 몸이 힘든 것보다 적응할 때까지 긴장한 게 더 많았던 듯하다. 적당한 긴장은 좋은 것이구나.
발에 물집이 느껴지고 어깨가 너무 아파왔다. 그리고 내 미래에 대해 생각했다. 좋은 이를 만나 서로 위하며 하루하루를 좋아하며 살고 좋은 일을 남에게도 하며 살면 좋겠다는 생각이 조용히 스쳐갔다.
앞으로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
이 길을 나는 또 무슨 기억으로 채울까? 무사히 도착하길.... 아름다움을 더 잘 느낄 수 있길.... 내일은 삼십 키로미터를 중간에 마을 하나 없이 가야한다. 알베르게에는 프랑스 사람들이 가득하다. 나이는 한 50~60대로 보이는데 그들의 걷는 속도는 심지어 빠르다. 미국인 아저씨 마크. 스코틀랜드 필립. 다섯 명의 프랑스인이 오늘 숙소에서 만난 내 순례자 친구들이다.
한 명이 참 심하게 코를 곤다. 왜 늘 코고는 내 옆자리일까 ㅠㅠ
내일도 무사히 아프지 않고 잘 걷기를 좋은 생각을 하기를 ... 부엔 까미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