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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2.26 -스크래치. 배경이 곧 역사다. 똑 자른 단발머리를 하고 한 손에는 크레파스, 다른 손에는 스케치북을 들고 뛰어다녔던 날이 생각난다. 앞치마 야무지게 두르고 크레파스를 꽉 쥐었다. 흰 도화지 위에 제일 좋아하는 파란색으로 그림을 그렸고, 또 그다음으로 좋아하는 초록색으로 칠했다. 알 수 없는 크고 작은 도형들을 구석구석 그려 넣었다. 알록달록 그린 그림을 들고 선생님한테 쪼르르 달려갔다. 보조개 웃음을 한 껏 지으며 자랑해 보였다. 선생님은 흐뭇하게 웃으시고선 자리에 앉아 검정 크레파스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시커멓게 칠하라 말씀하셨다.​ 손이 잘 가지 않았다. '검정색은 내가 좋아하지 않는데... 멋지게 그렸는데 검정색으로 칠하면 망칠 것 같은데...' 하며 머뭇거렸다. 내키지 않았다. 친구들이 열심히 칠하고 있는 것을 보고 마지못해 크레파스를 들었고 어쩔 수 없이 덮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그래서 속상했다. 망쳐버린 것만 같아 울적했다. 축 늘어진 어깨를 하고선 입 삐죽이고 있었는데, 선생님이 이쑤시개 하나를 손에 쥐어주셨다. 그리고는 날카로운 부분으로 검게 덮인 도화지 위에 새로 그려보라 하셨다. "선생님, 이건 색깔 있는 크레파스가 아닌데요? 그림을 그릴 수 없는걸요?" 했다. "색이 없는 크레파스지만 더 멋진 색깔로 그릴 수 있을 거예요!" 하시며 웃으셨다. 머리 위에는 물음표가 동동 떠다녔지만 우물쭈물하다 까만 종이 위에 작은 동그라미를 그려보았다. 신기하게도 빨간색, 노란색, ​보라색, 하늘색 여러 빛깔을 띠고 있었다. 놀라웠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암흑이라 여겼으나 조금씩 길을 내니 새로운 것들이 보였다. 그래서 마구마구 그렸다. 도화지 위에 그렸을 때보다 더 선명했고 눈에 잘 띄었다. 마치 비밀스런 세상을 발견한 듯 황홀했다.​ 이처럼 우리는 아무것도 없는 흰 도화지 위에 멋진 그림을 그리기를 꿈꾼다. 누군가로부터 방해받지 않고 온전히 그 속에서 자유로이 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때로는 아무것도 없는 그 백지상태가 막막함으로 느껴질 때가 있다. 무에서 유를 만들어내야 한다는 부담이 생기기 때문이며 흰 바탕에 그려진 무언가는 꽤 적나라해서 나의 지금을 들키기 쉽기 때문이다. ​ 하지만 우리는 하얀 도화지에서 시작되지 않는다. 새로운 시작은 티 없이 맑고 깨끗한 느낌이나, 오히려 까만색 짙은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내가 아직까지 발견하지 못한 혹은 눈치채지 못한 내 안에 내재되어있는 것들을 하나 둘 찾아가며 그려가는 것이 곧 삶이다. 나의 배경을 발견해 가는 것 그리고 나의 역사를 만들어가는 것이 점 하나 찍는 것에서부터 시작되는 셈이다. 그런데 만약 종이에 한가득 그려냈다 해서 과연 끝일까? 놀랍게도 도화지는 집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회사에도, 매일 걷는 산책로에도, 친구와 보내는 시간에도 숨겨져 있다. 마치 보물 찾기처럼. 그러니 가지고 있는 그림 하나가 완성되었다면 액자에 고이 넣어 나의 공간에 차곡차곡 세워두면 된다. 또 다른 도화지를 찾아 그려가는 것이다. 역사란 그렇게 발견하는 것이고 만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만약 이미 찾아버린 보물찾기 종이가 마음에 들지 않을 때도 있다. 그렇다 해도 실패는 아니다. 역사에는 정답이 없으며 나의 오롯한 힘으로 그려가는 이야기이기에 또 새로이 연결 지어 새로운 것을 만들어가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정되어있지 않고 유한할 뿐이다.​ 없었던 것은 없다. 모든 것은 이 세상의 실재에서 비롯되는 것이며 이를 바탕으로 적절히 짜깁기하며 흘러가는 것이 역사이기 때문이다. 고로 우리가 지금 해야 할 일은 생각하고 그려보며 발견하고 또 찾아가는 것이다. 나의 근원이자 배경을 발견하는 것이 나의 역사이며, 이들이 융합되어 더 큰 힘을 가진 것이 곧 역사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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