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서서 거듭 '대화'와 'Reflection'(아직도 이것을 성찰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좋을지 회고라도 표현하는 것이 좋을지 모르겠다)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오고 있다. 삶을 성찰할 수 있는 개인이, 일을 성찰할 수 있고, 그런 개인이 모인 곳에서 팀을, 조직을 성찰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시대의 '리더'조차도 성찰력을 갖추지 못한 경우도 종종 보인다. 성찰력을 뒷받침하는 데에 필수적인 것은 '메타인지'라고도 표현할 수 있는 다차원의 관점에서 대상을 바라볼 수 있는 시각이 필요하다. 이것은 미시적인 관점부터 거시적 관점까지의 스펙트럼의 넓이일 수도 있고, 직선을 넘어, '구'의 형태를 띄는 매우 입체적인 스펙트럼을 가질 수도 있다. 스펙트럼이 넓고 다양할수록 새로운 것을 알아차리고 발견하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 너무 다양한 스펙트럼 속 렌즈로 대상을 살펴보느라 삽질을 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겠지만, 보통 이토록 넓은 스펙트럼을 가졌다면, 적재적소에 어떤 레이어의 렌즈로 대상을 바라보는 것이 좋을지에 대한 직감 역시도 발달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인지력과 가장 유기적으로 연결된 것은 바로 질문력일 것이다. 질문은 자칫 매몰되기 쉬운 관점에서 벗어나게 도와줄 뿐 아니라, 내가 미처 탐색해보지 못한 관점이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기도 하고, 낯설거나 두려운 관점조차도 들여다볼 용기를 불러일으켜 준다. 뿐만 아니라, 질문을 만들고 답을 하는 과정에서, 더 큰 통찰이 '자신'으로부터 일어나기 때문에, 이것은 쉽게 잊혀지거나 휘발되지도 않는다. 여기서 더해지면 좋은 것이 바로 Compassion(역시 연민이라고 부르는 것이 좋을지 자비나 자애, 다정함 등 무엇이 좋을지 모르겠다)인데, 성찰을 통해 발견된 사실을 기준 삼아서 자신을 비롯한 성찰의 대상을 지적하고, 비난하지 않는 것이다. 부족한 점을 위주로 찾는 것이 아니라, 잘한 점과 새롭게 알게된 점에 집중하고, 그것을 하나 하나 경험해가고 있음에 감사와 지지를 표하는 것이다. 이러한 역량은 스스로와의 관계와 대화 속에서 기르는 것이 가장 쉽다. 무의식에 박혀버린 언어가 공격적이고, 직선적이며, 권위적이고, 부정적일수록 쉽지는 않겠지만, 자신과의 성찰적 대화를 통해, 무의식 속의 언어 또한 얼마든지 바꿀 수 있다. 우리의 무의식 속 언어는 어린 시절 귀따갑게 들은 가장 가까운 이들의 목소리와 말투, 자주 쓰는 표현인 가능성이 높다. 아직까지도 우리 세대는 무의식에 다정한 언어를 품고 자라난 경우는 많지 않을 것이다. 부모님이, 어른 시절 나에게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 누군가가 내게 쓴 언어는, 곧 내가 내 자신을 대하는 정서와 태도가 되고, 결국 내가 타인을,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된다. 학습에 의해 나의 외부 대상을 대하는 언어와 태도, 관점을 어느 정도 바꿀 수 있다고 하겠지만 그것은 본인의 에너지가 닿는 한 '그런 척'을 할 뿐이지, 진실로 바뀐 것은 아닌 경우가 많다. 당신은 어떤 관점으로 당신을 바라보고 있는가? 당신은 당신에게 어떤 질문을 던지는가? 당신은 당신에게 얼마나 친절한가? 혹은 당신은 이 모든 것이 중요치 않다고 생각하는가? 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