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온 세월이 쌓여간다는 것은 꽤나 흥미로운 일이다. 나에 대한 표본, 빅데이터가 늘어난다고도 볼 수 있는데, 내가 나의 트렌드를 분석하기에 있어 데이터가 늘어난다는 것만큼 신나는 일이 또 있을까 싶다. 이를 통해 '나'와 '삶'을 최적화할 수 있다는 것 역시도 삶의 주도권을 갖는 것만 같아 자기효능감이 높아지게 한다. 살면서 가장 많이 해온 것이 무엇인가? 애쓰지 않고도 저절로 되었던 것이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해본다면, 나는 3가지 찰(察)을 대답할 수 있을테다. 하나는 관찰이요, 하나는 성찰이요, 마지막은 통찰이다. 찰이라는 단어의 뜻은 '살펴서 알다'라는 뜻이라는데, 아마도 내가 이런 인간이라 나의 데이터를 수집하고 분석하여 최적화된 선택을 내리는 것에 더 관심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관찰에는 시간이 필요하다. 내가 고작 한 순간의, 혹은 몇달이나, 몇년 정도 안에서만 발견된 패턴만으로 '나'에 대해 확신할 수 없듯이 (그때는 그게 나라고 생각했겠지만) 다양한 변수가 되는 상황과 관계들을 만나고 떠나보내도록 공통적으로 관찰되는 표본이 쌓이려면 일이십년의 인생으로도 '나'를 안다고 이야기하기는 쉽지 않을테다. 성찰에는 질문이 필요하다. 가장 쉬운 질문은 바로 '왜?'일 것이다. 나는 그것이 '왜' 마음에 남는가? 나는 '왜' 그런 감정을 느끼거나 그런 생각을 하는가? 나에게 '왜' 이런 경험이 주어졌는가? '왜'를 통해 발견된 조건들에 다른 가설을 붙여보면 흥미로운 지점을 발견하거나, 내가 삶에 매몰되지 않게 도울 수도 있다. 통찰에는 다정함이 필요하다. 사실 '무조건적인 사랑'이라는 표현이 더 적합하겠지만, 관찰과 성찰의 과정이 안전하지 못하고, 위협적이라면 그 어떤 통찰도 왜곡되어 일어나기 쉽상일테다. 관찰의 대상, 성찰의 대상, 그 행위를 하고 있는 나라는 대상까지도 애정어린 시선으로 따뜻하게 돌볼 수 있을 때에 내가 진정으로 만나야 하는 앎이 내 안에서 떠오르게 된다. 이 3가지 '찰'을 일어나기 하는 공통된 기본 요소는 바로 각자가 가진 '무의식'과 '경험'이다. '살펴서 안다'라는 것은 '대화'의 기본 요소가 되기도 한다. 내가 나와 나누는 대화가, 내가 타인과 나누는 대화가, 내가 나의 동료와, 나의 팀과, 나의 리더와. 혹은 리더로서 구성원과, 조직으로서 구성원과 나누는 대화가 '살펴서 알기 위함'을 전제로 하기를 바란다. 우리가 '대화'를 할 수 있는 존재들인 이상, 우리는 서로에게 꼭 필요한 '살필거리'를 제공하는 역할을 기꺼이 맡은 감사한 존재들이라는 것을. 그것이 때로는 아프고, 때로는 유쾌하지 않을 지라도, 각자가 비춰내고 있는 그 살필거리를 품어 안을 때에 그 너머의 우리의 '앎'이 떠오르리라는 것을 기억하는 세상이 되기를 바란다.
로그인 후 모든 글을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