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의 고수 조훈현과 이창호의 대결을 그린 영화 ‘승부’ 1989년 9월 ‘바둑 올림픽’ 잉창치배에서 우승한 조훈현은 기세등등했다. “바둑의 신(神)하고 둔다고 해도 지진 않을 것 같습니다.”라고 인터뷰를 할 정도로 패배를 모르는 ‘바둑의 전신(戰神)’으로 불렸다. 아홉살에 최연소 프로 데뷔한 그는 30대 중반 절정의 기백이 넘쳤다. 제자 이창호를 만나기 전까진 그랬다. 한지붕 아래 먹이고 입히며 가르친 제자 이창호는 불과 15세에 스승이 가진 타이틀을 차례로 빼앗고 ‘바둑의 산신(算神)’으로 떠올랐다. 무관으로 전락한 조훈현은 무너진다. 하지만 다시 반상에서 제자를 적수로 마주한 조훈현의 담담한 인정은 또 한 번의 패배라도 감내하고 이겨나가겠다는 다짐을 한다. “또 너냐. 도리 없지. 이것이 승부니까.” 조훈현은 이후에도 제자와 대적했고 때로 패했지만 재차 도전했다. “자신의 바둑을 찾아라.” 가로세로 각 19줄이 교차하는 바둑판엔 361개의 점이 존재한다. 그 점 위에서 흑백의 돌이 싸우고, 부딪치며 승부를 가른다. 바둑판에서 올 수 있는 경우의 수는 무려 10의 170제곱. 사실상 무한대에 가깝다. 초보자라면 정석을 익히고 그에 맞는 수를 두면 된다. 하지만 어느 정도 수준에 도달한 자는 자기만을 길을 개척해야 한다. 조훈현과 이창호는 한솥밥 먹는 식구가 됐지만, 제자의 스타일은 스승과 전혀 달랐다. 스승이 초중반 바람보다 빠른 속력행마로 달려가며 날쌔고 빠른 ‘제비’에 비유되었고, 제자는 강태공처럼 앉아 확실한 끝내기 기회를 노리는 조용하고 침착한 ‘돌부처’로 통했다. 무엇보다 스승은 ‘이기는 바둑’을, 제자는 ‘지지 않는 바둑’을 했다. 이창호는 역전 확률이 10%라도 있다면 회피하는 대신, 정밀한 계산력을 이용해 작게 이기더라도 100% 이기는 길로 갔다. 그래서 이창호가 얻은 별명이 ‘신산(神算·신의 계산)’이다. 최고의 자리에서 제자에게 속절없이 밀려난 스승은 하루 서너 갑씩 줄기차게 뿜어 댔던 담배를 끊고 절치부심 했다. 이창호 특유의 계산력을 흔들고자 과감하게 기풍도 바꿨다. 그렇게 귀환한 뒤 활화산같이 부활하며 제2의 전성기를 열었다. 그때 그에게 붙여진 별명이, 지금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는 ‘전신(戰神·전투의 신)’이다. 이창호가 조훈현을 디딤돌 삼아 자신만의 스타일을 찾았듯, 조훈현도 이창호라는 변수를 만나 자신의 최선을 다시 끄집어낸 셈이다. 조훈현은 에세이 ‘조훈현, 고수의 생각법’에서 “바둑 기사에게 자신만의 기풍(류)은 일종의 자아”라고 했다. “바둑을 어떤 식으로 놓는다는 것은 세상을 어떤 식으로 살아가겠다는 나만의 선언”이라 하였다. 일류 기업은 회사별로 독창적인 인사 철학에 기반한 인사 제도를 보유하고 있다. 구글의 채용제도를 살펴보자. 전체 인사과정에서 특히 채용과정에 가장 역점을 두고 있다. 복잡한 심사 과정과 엄격한 채용을 통해 이른바 ‘구글스러운 사람’을 뽑는다. 그 바탕에는 “사람을 뽑지 않는 것이 부적격자를 뽑는 것보다 낫다”는 대원칙이 있다. 지원부터 채용확정까지는 보통 69개월이 소요된다. 직원 1명 채용을 위해 무려 150500시간을 투입한다. 인원 부족으로 업무가 원활하게 진행되지 않더라도 적격자를 찾을 때까지 채용하지 않으며, 데이터 분석과 경험을 토대로 채용방식을 지속적으로 개선하고 있다. 또한 ‘직원간 학습 프로그램(G2G, Googler-to-Googler)’을 중심으로 지식공유를 장려하는 풍토도 중요시한다. 교육 원칙에 부합하는 학습 네트워크 G2G를 도입, 구성원의 자기계발 욕구를 자극하고 역량 발전을 도모한다. 효과적인 채용 과정을 통해 역량이 우수한 직원들을 선발했더라도, 환경 변화에 대응하고 지속가능한 성장을 위해서는 구성원의 역량 발전이 필수라는 철학이 깔려 있다. G2G는 전사적으로 직급과 관계없이 상호 신뢰를 바탕으로 운영됨에 따라 자발성을 높이고 학습을 업무에 내재화하여 성과를 올리는 동력이 되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몇 해전 알파고와 이세돌 세기의 대결 이후 많은 이들은 AI라는 바둑 고수 밑에서 AI가 정답이라고 알려주는 수를 획일적으로 두게 되었다. AI 글쓰기, AI 그림, AI 음악 등 많은 분야에서 마찬가지 조짐이다. “한국 기업의 인사에는 색깔이 없다.”는 지적이 적지 않다. 한국 기업의 HR이 색깔을 갖지 못한 데는 이유가 있다. 독창적 자기 철학이 없는 지나친 벤치마킹의 결과다. 한국 기업들은 항상 좋은 것을 찾는다. 매스컴에서 숭배하고 선진기업에서 유행하는 관행, 글로벌 컨설팅 회사가 제시하는 새로 나온 기법 등을 열심히 받아들인다. 복장은 자유롭게, 말투는 공손하게 바꾸고, 새로운 기법의 평가제도를 도입하고, 능력주의와 성과주의 인사제도를 따라 하고, 연봉제, 인센티브제도, 이익배분제도, 스톡옵션제를 모방한다. 예컨대, 핵심성과지표(KPI·Key Performance Indicator)나 목표성과지표(OKR·Objective Key Result) 등은 단지 관행에 불과할 뿐이고 목표에 미달해도 책임지는 사람이 없다. 연봉제를 도입해도 연공서열에 따른 호봉제가 함께 존재한다. 양복에 삿갓을 쓴 격이다. 자기의 철학 없이 이것저것 받아들이다 보니 조율이 안 되고 자기 색깔이 없는 국적불명의 시스템이 되었다는 맹점이 있다. “자신의 바둑을 찾아라” 스승이 될 수 없음을 알게 된 조훈현이 이창호에게 한 말이다. 배경이나 경영자의 조직 운영 철학을 반영하여 보통 기업들과는 차별화되는 독창적인 인사 제도를 자주 볼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