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 가지 역사 속 인사이야기, 人事萬史] 모두 아시는 것처럼 조선은 성리학의 나라였습니다. 왕과 신하, 백성 모두가 성리학의 질서 안에서 삶을 살았고, 나라의 제도와 도성의 구조에도 이 사상이 녹아 있었습니다. 성리학의 기본 가치는 어짊, 의로움, 예의범절, 지혜, 믿음이었습니다.우리가 발을 붙이고 사는 서울에서도 그 철학을 느낄 수 있습니다. 동쪽의 흥인지문(興仁之門)은 ‘인(仁)’을 담았습니다. 인은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이자, 삶을 시작하는 첫걸음입니다. 해가 뜨는 동쪽에 인의 문을 세운 것은 새로운 시작과 생명력, 그리고 서로를 아끼는 넉넉함의 가치를 새기기 위함이었습니다. 서쪽의 돈의문(敦義門)은 ‘의(義)’의 문입니다. 하루가 저물어 가는 서쪽에 세운 것은 정리와 마무리의 자리에서 반드시 지켜야 할 것이 의(義)임을 뜻합니다. 옳은 일과 그렇지 않은 일을 구별하고, 때로는 단호히 선을 그을 줄 아는 리더의 자세, 그 모든 것이 돈의문에 담겨 있었습니다. 남쪽의 숭례문(崇禮門)은 ‘예(禮)’의 문입니다. 세상과 마주하는 출입구에서 예를 강조한 것은 사람과 사람 사이, 나라와 나라 사이의 경계에 반드시 지켜야 할 격식과 질서를 의미합니다. 교류와 교섭의 현장에서는 예가 무너지면 모든 질서가 무너지기 때문입니다. 북쪽의 숙정문(肅靖門)은 ‘지(智)’의 문입니다. 숙정이라는 이름처럼 고요하고 깊은 사유가 머무는 자리, 지혜가 자라는 곳을 의미합니다. 북쪽은 차갑고 엄숙한 방향이지만, 그 속에서 세상을 읽는 눈과 멀리 내다보는 안목이 길러집니다. 그리고 도성 한가운데의 보신각(普信閣)은 ‘신(信)’을 상징합니다. 매일 울리던 종소리는 신하와 백성 모두에게 하루의 시작과 끝을 알리는 약속이자 경계였습니다. 리더에게 있어 신뢰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조직의 기둥이 되는 존재입니다. 조선은 이처럼 도시의 설계에까지 인의예지신을 새겨 넣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조선의 왕 중 한 사람인 선조는 이 균형을 잃어버린 리더였습니다. 물론 시대적인 불가항력도, 선조가 처한 특수한 상황도 우리는 모두 이해해야 합니다. 하지만 오늘은 선조가 잃어버린 다섯가지 가치를 통해 그를 비판하고 현대 리더의 HR의 시사점을 함께 살피고자 합니다. 선조는 사실 조선 왕조의 군왕들 중에서도 손꼽힐만큼 똑똑한 인물이었습니다. 그의 초반 치세는 '목릉성세'라고 일컬어질만한 태평성대였고 임진왜란 후에도 백성들을 위무하며 전후복구에 최선을 다하기도 합니다. 선조는 인(仁)이 넘쳤습니다. 유능한 인재를 알아보는 눈이 있었고, 많은 학자와 신하들을 중용했습니다. 그러나 그 인이 지나쳤습니다. 결단해야 할 때 연민에 머물렀고, 선의로 포장된 무책임이 조직의 긴장을 무너뜨렸습니다. 그는 자신의 정치적인 목적을 위해 선택적인 '어짊'을 남발하였습니다. 때로는 누군가에게 칼을 들어야 조직이 바로 서는데, 그는 칼을 드는 대신 회유와 유화로 일관하는가 하면 임금의 총애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기도 하였습니다. 신하들은 선조의 결정에 불만이 있어도 '어진' 그의 결정에 따를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의(義)는 결여되었습니다. 붕당정치가 극에 달했을 때, 선조는 동인과 서인 사이에서 줄타기를 했습니다. 모두를 만족시키려는 시도는 결국 모두를 실망시키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그는 또한 개인의 의로움을 들먹이며 정여립의 난으로 인한 기축옥사, 건저 건으로 인한 서인탄핵 등 사실상 최초의 환국을 남발하기도 합니다. 의는 때로 결단과 희생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선조는 자신의 자리와 인기를 유지하기 위한 정치적 균형을 택했지, 진정한 의미의 원칙과 정의를 세우지 못했습니다. 예(禮)는 형식으로만 남았습니다. 각종 의례와 절차는 철저히 따랐지만, 위기 앞에서 그 예는 본질을 잃고 허울 좋은 의전으로 전락했습니다. 회의는 거듭되었고, 보고는 쌓였으나 그 속에는 실질적 결단이 없었습니다. 리더가 스스로 무게 중심을 잡지 않으면, 예는 조직의 답답한 껍데기가 될 뿐입니다. 그는 임진왜란 중 명으로 망명할 뜻을 비춰 많은 신하들을 충격 속에 빠뜨리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리더로서 신하들과의 균형보다 자신이 받는 '예'에 더욱 집중하였습니다. 그런가하면 지(智)는 외부에 의존했습니다. 류성룡, 이이 같은 지혜로운 신하가 곁에 있었지만, 그들의 의견을 듣는 귀는 있었으나 받아들이는 용기와 실행하는 결단은 부족했습니다. 지혜는 듣는 데서 끝나지 않고, 실행으로 옮기는 힘입니다. 그 힘이 부족했던 왕은 결국 자신의 부족한 지혜를 신하의 재능으로 채우려 했고, 위기 앞에서 무너졌습니다. 부산으로 수군이 진격하는 것에 대해 현장 지휘관인 통제사 이순신이 반대하였지만 그는 아첨하던 원균을 통제사로 삼아 진격을 명하였고 칠천량에서 원균이 이끈 조선수군이 전멸하자 '그럴 줄 알았다.' 는 식으로 일관하기도 하였습니다. 신(信)은 무너졌습니다. 임진왜란이 터졌을 때 선조는 한양을 등지고 의주로 피난을 떠났습니다. 그의 선택이 백성을 위한 것이었는지, 자신을 위한 것이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순간 리더의 자리가 비었다는 사실입니다. 한 번 금이 간 신뢰는 다시 회복하기 어렵습니다. 그 이후 선조는 무엇을 말해도 무게가 실리지 않았습니다. 그 후 선조는 분조를 나누어 광해군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자신은 뒤로 물러나 앉았습니다. 이 모든 것은 오늘의 리더에게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인의예지신은 시대를 초월하는 리더십의 근본입니다. 그러나 다섯 가지를 골고루 지키는 일은 어렵습니다. 인이 지나치면 흐려지고, 의가 없으면 흔들리며, 예가 껍데기만 남으면 답답해지고, 지가 외부에만 머물면 무능해지며, 신이 깨지면 모든 것이 무너집니다. 리더는 매일 스스로에게 물어야 합니다. 나는 사람을 사랑하는가? 나는 옳고 그름을 분명히 하고 있는가? 나는 절차를 지키되 본질을 잊지 않고 있는가? 나는 지혜를 실행으로 옮기고 있는가? 나는 나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가? 선조의 실패는 우리의 거울입니다. 실패의 기록은 비난을 위한 것이 아니라, 반복하지 않기 위해 기록되는 법. 오늘도 나는 그 다섯 글자를 가슴에 새깁니다. 인. 의. 예. 지. 신. 그리고 그 글자들이 내 행동 속에서 조용히 빛나기를 바랄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