덴마르크 출신의 동화 작가이며, <미운 오리 새끼> 동화로 유명한 <한스 안데르센, Hans Christian Andersen>은 “자기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 진정한 진보의 시작이다.”라고 이야기 했다. 100세 시대임에도 절반의 나이에 직장 문을 나서야 하는 것이 현실이다. 눈을 크게 뜨고 상황을 냉정하게 바라보자. 현실을 직시하지 않으면 근거 없는 낙관 속에 숨어 지내다가 희망이 절망으로 돌변한 자신의 모습을 마주하게 된다. 만만치 않은 현실이지만 회피하거나 나와 무관한 일로 치부하지 말고 그대로 받아 들여야 한다. 절실함은 현실을 수용해야 생긴다. 그러나 미래에 대한 믿음은 잃지 말아야 한다. 이것이 불안한 시대를 살아가는 현명한 태도라 할 수 있다. 어쩌면 “내일이 새로울 수 없으리라는 확실한 예감에 사로잡히는 중년의 가을은 난감하다.”라고 이야기한 ‘김훈’의 명문장이 마음에 와 닿는 이유일것이다. 인생의 중반에서 새로 시작해야만 하는 시대에 새로 시작할 거리가 없는 것은 참 난감한 일이다. 평균수명이 늘어나면서 삶은 자꾸만 버거워진다. 해는 아직 중천에 떠 있는데 갈 길은 아득하다. 좋은 직장에서 강제 퇴직 위험 없이 정년까지 보내거나 자신의 전문분야에서 최고의 경쟁력을 유지하고 싶지만 대다수 직장인들은 이 꿈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 퇴직 후 30년 이상의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하는지, 무엇으로 먹고 살아야 하는지 많은 고민을 한다. 직장인의 미래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지만 분명한 것은 입사만 하면 어느 정도 미래가 보장되던 시절은 지나고 오로지 자신의 실력, 브랜드, 네트워크 자산에 의지해야 하는 시대가 도래했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철저하게 스스로 자신에 대해 객관적으로 바라봐야 한다. 내가 아닌 것은 과감히 버리고 내가 가지고 있는 내면을 자산을 활용하여 유의미한 것을 만들어낼 수 있어야 한다. 그동안 잃어버린 ‘나’를 찾아서 직장 선배를 오랜만에 만났다. 젊은 시절부터 30년 넘게 한 직종에서 종사하신 후 작년에 정년퇴직을 맞으신 분이다. 오랜만에 만나 안부 인사와 함께 퇴직 후 달라진 자신의 삶을 이야기 하셨다. 퇴직 후 일이 없는 낯선 일상 속에서 처음 얼마간은 방황을 했다고 한다. 요즘에는 오래전에 꿈꿔오던 취미를 시작했다며, 오토바이를 타고 경치 좋은 곳을 달리는 사진을 보여 주셨다. 상기된 목소리에서 퇴직 후 또 다른 삶을 즐기는 선배의 모습이 고스란히 묻어났다. 나는 중후하고 점잖던 평소 그분의 분위기에서 사뭇 다른 모습을 보면서 경탄과 함께 진심 어린 응원을 보냈다. 평범한 우리들은 대부분은 하고 싶은 것보다는 해야 하는 일을 하며 산다. 안락한 의식주와 성공하는 삶이 우선이기에, 나머지 욕망은 속절없이 억눌린 채 ‘언젠가 또는 멋 훗날’로 밀려난다. 하지만 우리 모두는 자유로운 삶을 원한다. 일찍이 경제적 부를 이루어 젊은 나이에 생업을 은퇴하는, 이른바 파이어족을 꿈꾼다. 현실 속 평범한 우리에게는 로또 당첨이라도 된다면 모를까 신기루 같은 이야기일 뿐이다. 정년퇴직은 그나마 생업에 파묻혀 사는 직장인이 꿈꿀 수 있는 달콤한 미래다. 흔히 제2의 인생이라 믿는 데에는 그만큼 극적인 삶의 변화를 바라는 사람들의 속 마음도 들어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경쟁에 익숙해진 현대인은 잃어버린 자기만의 욕망, 진짜 자기가 원하는 것을 찾느라 평생을 바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는 누구인가?’ 가장 단순하고도, 가장 어려운 질문이다. 혹자는 자기 진짜 욕망이 무엇인지 모를 때는 어린시절로 돌아가 보라고 말한다. 세상을 향해 잔뜩 충혈된 시선을 멈추고, 마음 속 울림에 귀를 기울여 보자. 그때 가슴 벅찼던 순간들, 티 없이 맑은 웃음들, 내가 버려둔 욕망이 방치된 그곳을 말이다. 새로운 출발을 위해 ‘자기 성찰’이 필요하다 “나는 누구인가? 우리는 자신이 생각하는 자신이 바로 자신이고, 남들이 생각하는 자신 역시 자신이라고 착각한다. 그래서 자신의 감정을 따라 분주하게 뛰어다니기도 하고, 남의 감정에 끌려 뛰어다니기도 한다.” <허유영, 반야심경 마음공부> ‘나는 누구인가?’이 질문은 평생 풀어야 할 숙제처럼 느껴진다. 깊이 생각하지 않았을 때는 단순히 한 문장으로 나를 정의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스스로를 탐구하면 할수록 마치 끝이 보이지 않는 미궁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듯하다. 손을 뻗으면 닿을 것 같다가도 예상치 못한 나의 모습과 마주하며 낯설어지고, 때로는 당황스러워진다. 그러나 그 미지의 길이 아직도 펼쳐져 있다는 사실에 묘한 설렘이 인다. 나는 내 안에 다양한 얼굴을 품고 있다. 몸과 마음이 가벼운 날의 나, 지친 날의 나, 스스로 생각하는 나와 타인이 바라보는 나, 기쁨에 벅찬 순간의 나와 불안에 흔들리는 나, 그 모든 모습이 조각처럼 흩어져 있다. 예전에는 누군가가 “너는 이런 사람이야.”라고 말하면, 그 말에 쉽게 나를 끼워 맞추곤 했다. 그러나 이제는 안다. 그들은 내 하루 중 단 몇 시간을 스쳐 갔을 뿐인데, 어찌 나를 온전히 알 수 있을까? 때때로 나는 나를 한 걸음 물러서 바라본다. 마치 소중한 딸을 보살피듯이. 그녀에게 어떤 옷을 입혀 줄지, 어떤 음식을 먹이고 싶은지, 어떤 말을 건네고 싶은지, 그리고 어떤 생각과 행동을 권하고 싶은지 고민하며 나 자신을 돌아본다. 세상은 좋아하는 일을 해야 행복하고 성공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나는 안다. ‘좋아함’은 유리잔 속의 물처럼 늘 같은 모양을 유지하지 않는다. 한때 골프에 빠져들었을 때, 그것이 진정한 열정이라 믿었다. 그러나 문득 깨달았다. 그것은 ‘좋아하는 것 같은 느낌’이었을 뿐이라는 것을 말이다. 결국 나라는 존재를 가장 깊이 이해해야 할 사람은 나 자신이다. 누구보다 가까이에서 나의 감정을 느끼고 변화의 길을 따라가는 유일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나와의 관계도 친밀하지 않으면 깊은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다. 그렇기에 나는 나의 평생을 함께할, 결코 헤어질 수 없는 운명적 반려자와 가까워진다. 그 존재는 다름 아닌, 나 자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