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 가지 역사 속 인사이야기, 人事萬史] 위대한 영웅의 몰락 - 수양제의 인재경영실패 역사 속에서 권력을 잡은 리더들은 대부분 인재를 어떻게 등용하고 활용했느냐에 따라 명군과 폭군으로 나뉘었습니다. 수나라의 황제였던 수양제 양광(楊廣)은 왕자 시절 냉철한 정치 감각과 권모술수로 강력한 지도력을 보였지만, 재위 기간 동안 인재 경영에 실패하면서 결국 몰락의 길을 걸었습니다. 그는 능력주의를 앞세운 인재 등용을 시도했지만, 결과적으로 측근 정치로 변질되었고, 무리한 프로젝트로 조직을 소진시키며 스스로 왕좌를 잃고 말았습니다. 1. 전략가에서 독재자로 – 초기의 인재 등용 수양제는 황제에 오르기 전부터 뛰어난 전략가였습니다. 그는 581년, 아버지인 양견이 북주의 정제로부터 선양을 받아 수나라를 개창하고 황제에 오르자 13세의 나이로 진왕(晉王)에 봉해졌습니다. 그리고 불과 8년 뒤인 589년, 그는 수나라의 남정군 총사령관이 됩니다. 그는 오십만 대군을 이끌고 남쪽의 진(陳)나라를 멸망시켜 위진남북조를 종식시키고 4백년만에 다시금 천하를 통일하는 데 가장 큰 공을 세웁니다. 이후 그는 철저히 자신의 본심을 숨긴 채 검소하게 생활하는 척 하였습니다. 결국 형인 태자 양용(楊勇)이 폐태자되자 황태자에 올랐습니다. 그 후 그는 점차 본색을 드러냈습니다. 아버지인 수문제를 시해하였고 아버지의 여자였던 진귀비를 겁탈하기도 합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전략가의 면모를 잃지 않았습니다.강력한 군대를 이끌고 있던 동생인 양량(楊諒)의 반란을 조기에 진압하며 자신의 권력을 확립했고, 양소(楊素) 같은 강력한 권력자들을 숙청하며 체제를 정비했습니다. 또한 북방의 근심거리였던 돌궐을 힘 하나 들이지 않고 와해시키는 가 하면 만리장성을 보수하였습니다. 특히 그의 인재 등용 방식은 초기에는 매우 합리적이었습니다. 기존 귀족 중심의 인사 체계를 흔들고 아버지가 만든 과거제(科擧)를 확대하면서 실력 있는 신진 인재들을 기용했습니다. 배구(裴矩) 같은 외교 전문가를 중용하여 돌궐(突厥)과의 외교 전략을 세우게 했고, 우문개(宇文愷) 같은 건축 전문가를 등용하여 대운하 건설 및 동도건설 등 각종 토목공사을 추진하게 했습니다. 그의 정책은 당대에는 혁신적이었으며, 조직 내에서 능력 중심의 문화를 조성하려는 의도가 엿보였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이러한 개혁이 지속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공정한 인사 원칙을 강조했던 그는 점점 측근 중심의 정치로 방향을 틀기 시작했습니다. 즉, 초기에는 능력주의를 표방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자신을 지지하는 세력만을 중용하는 폐쇄적인 리더십으로 변해갔습니다. 2. 무리한 목표 설정 – 조직을 소진시키다 리더는 조직의 방향성을 제시해야 하지만, 그 목표가 조직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설 경우 구성원들의 번아웃을 초래할 수 있습니다. 수양제는 대운하 건설과 고구려 원정이라는 두 개의 초대형 프로젝트를 무리하게 추진하면서 결국 조직 전체를 소진시키고 말았습니다. 대운하는 장기적으로는 경제적, 군사적으로 큰 가치를 가질 수 있는 인프라였지만, 당시 수나라의 자원과 인력을 감안했을 때 지나치게 과도한 프로젝트였습니다. 수백만 명의 인력을 동원하며 강제 노역을 시행했고, 그 과정에서 백성들의 불만이 폭발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처럼 지나치게 야심찬 목표는 리더 개인의 명분은 세울 수 있지만, 조직이 이를 감당할 수 없다면 오히려 시스템을 무너뜨릴 수 있습니다. 고구려 원정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세 차례에 걸친 고구려 원정은 모두 실패로 끝났고, 이는 군사적 손실뿐만 아니라 내부적으로도 리더십에 대한 신뢰를 크게 무너뜨리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특히 612년의 원정은 113만이라는 그야말로 초유의 대군을 동원한 대규모 원정이었습니다. 그는 이때 살수대첩에서 30만 대군을 한꺼번에 몰살시켰음에도 포기하지 않고 두 차례나 더 고구려를 침공하는 실수를 저지릅니다. 그로 인해 지방의 농지가 방치되었고 치안이 악화되며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고 맙니다. 심지어 수양제는 수도인 장안에도 돌아가지 못하고 양주에서 생을 마감합니다. 아버지인 수문제의 개황성세를 불과 10여년만에 모두 박살낸 것입니다. 이때 무너진 중국의 인프라는 150여년 후인 당나라 현종대에 이르러서야 복구될 정도였습니다. 대규모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이끌기 위해서는 조직이 버틸 수 있는 수준에서 목표를 설정해야 하는데, 수양제는 이를 고려하지 않았습니다. 3. 반대 의견을 차단하는 독단적 리더십 조직 내에서 반대 의견을 어떻게 처리하느냐는 리더십의 중요한 요소입니다. 수양제는 초기에는 실용적인 개혁을 추진하며 다양한 의견을 받아들였지만, 점차 자신의 의견만을 고집하는 독단적인 태도로 변해갔습니다. 측근들만을 신뢰하며 반대 의견을 내는 사람들을 숙청했고, 그 결과 조직 내에서 리더에게 직언할 수 있는 사람이 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앞서 말했듯 공신이자 권신이었던 양소를 죽이고 그의 아들인 양현감(楊玄感)을 중용하였습니다. 결국 양현감은 훗날 반란을 일으켜 그의 몰락을 재촉하는 촉매가 되고 맙니다. 또한 태자 시절부터 자신을 따르며 충언을 하던 장형(張衡)을 끝내 유배보내고 죽였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우문화급(宇文化及)의 사례는 이를 극적으로 보여줍니다. 우문화급은 수나라의 대장군인 우문술의 아들이며 수양제의 사위인 우문사급의 형입니다. 우문화급은 607년, 나라에서 금지한 밀수를 하게되고 수양제는 이에 분노해 그를 아버지인 우문술의 종으로 만들어버립니다. 그는 호부견자라며 우문화급을 늘 조롱하는 동시에 근위장군으로 중용하는 이중적인 태도를 보였습니다. 결국 우문화급은 618년, 천하가 혼란에 빠지자 반란을 일으켜 수양제를 살해합니다. 이는 인재를 잘못 활용한 대표적인 실패 사례로 남게 되었습니다. 리더는 조직 내에서 불필요한 적을 만들지 않는 것이 중요하며, 특정 계층을 차별하거나 무시하는 태도는 조직 내부의 균열을 초래할 수 있습니다. 4. 조직 문화의 붕괴 – 공정한 인사 시스템의 실패 조직이 장기적으로 유지되기 위해서는 공정한 인사 시스템이 필수적입니다. 수양제는 초기에는 능력주의를 강조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자신의 측근들에게만 권력을 집중시키고 정실 인사를 단행하며 조직의 균형을 무너뜨렸습니다. 결국 배구와 같이 그가 중용했던 인재들도 이러한 세태에 변질되어 교언영색하는 간신배로 전락하고 맙니다. 즉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걸 넘어 양화도 악화로 만들어버린 꼴입니다. 이는 결국 심각한 내부 반발을 불러왔고, 결과적으로 수나라의 붕괴로 이어졌습니다. 오늘날 기업에서도 비슷한 사례를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초기에 능력 중심으로 운영되던 기업이 점차 창립 멤버나 특정 인맥 중심으로 돌아가면서 내부 불만이 커지고, 결국 조직의 생산성이 저하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리더가 초심을 잃고 측근들만을 신뢰할 경우, 조직 내 공정성과 투명성이 사라지고 내부 갈등이 심화될 가능성이 큽니다. 5. 수양제의 사례가 현대에 주는 교훈 수양제의 실패는 단순한 개인의 몰락이 아니라, 리더십과 조직 관리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패턴을 보여줍니다. 이를 통해 오늘날 기업과 조직이 배울 수 있는 교훈은 다음과 같습니다. 능력 중심의 인사 원칙을 지속적으로 유지해야 한다.초기의 공정한 채용 시스템이 시간이 지나면서 왜곡될 경우 조직이 무너질 수 있다. 조직의 목표 설정은 현실성을 고려해야 한다.야망이 지나치면 조직의 리소스를 소진시키고 반발을 초래할 수 있다. 반대 의견을 수용하는 열린 리더십이 필요하다.조직 내에서 직언을 할 수 있는 문화를 조성하지 않으면 리더가 현실을 왜곡되게 인식하게 된다. 측근 중심의 인사는 조직을 망칠 수 있다.조직의 공정성과 투명성이 무너질 경우 내부 불만이 커지고, 결국 조직 자체가 와해될 수 있다. 수양제는 초기에는 분명 냉철하고 뛰어난 전략가였지만, 결국 스스로 설계한 함정에 빠져 몰락했습니다. 그의 실패는 단순한 역사적 사례가 아니라, 현대 조직이 지속 가능한 성장을 위해 반드시 고려해야 할 중요한 교훈을 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