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만 가지 역사 속 인사이야기, 人事萬史 ] 우리가 ‘삼국지’로 익히 알고 있는 2세기 후반의 중국은 혼란 그 자체였습니다. 당시 중국을 지배하던 이는 한나라의 영제였습니다. 그는 황제의 신분으로 직접 매관매직을 행하며, 십상시로 대표되는 환관과 하진으로 대표되는 외척을 동시에 활용하여 강력한 황권을 구축하였습니다. 흔히 후한의 영제를 나약하고 허수아비 같은 존재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지만, 이는 사실과 다릅니다. 십상시는 영제의 강력한 황권 아래 존재하였고, 외척인 하진의 권력 또한 마찬가지였습니다. 황제의 매관매직은 지방관들의 수탈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으며, 이로 인해 양심 있는 관료들은 지방 태수로 부임받자 백성을 수탈할 수 없다며 자결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가렴주구는 결국 중국 최초의 종교적 민란인 황건적의 난으로 이어졌고, 이는 중국을 수백 년간의 혼란기인 위진남북조 시대로 몰아넣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젊은 시절 이러한 한나라의 몰락을 목격한 조조는 자신이 한의 전권을 잡은 이후 환관과 외척을 극도로 배격하였습니다. 한편, 긴 후계자 갈등 끝에 왕위에 오른 그의 아들 조비는 황제의 자리를 위협할 수 있는 직계 황족을 경계하였습니다. 심지어 그는 자신의 형제들인 조식과 조창마저 숙청하기까지 이르렀습니다. 조비는 형제들의 빈 자리를 황제에 도전하기 어려운 방계 황족으로 채웠습니다. 그는 조위 황실의 방계 황족인 조진, 조휴, 하후상에게 군권을 위임하고, 지방 호족 출신인 사마의와 진군에게 내정을 맡기는 방식으로 위나라 정권을 운영하였습니다. 이는 한나라의 몰락에서 얻은 교훈을 반영한 것이었습니다. 그 결과 조위 정권에서는 환관, 외척은 물론 직계 황족조차 황제의 권위에 도전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제 아무리 조조의 아들이라 하더라도 이름뿐인 왕에 책봉되었을 뿐이고 중앙의 정치에 이들이 관여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 체제에도 약점은 있었습니다. 군권을 맡은 방계 황족이 무능해질 경우를 대비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조비의 아들 조예 시대까지는 이러한 체제가 효과를 보였으나, 어린 황제 조방이 즉위하면서 위나라는 위기를 맞이하였습니다. 조진의 아들 조상이 지나치게 무능하였고, 내정을 맡은 사마의는 맹달의 반란 진압, 제갈량의 북벌 저지, 공손씨의 연나라 토벌 등 굵직한 전공을 세워 정치적 영향력을 지나치게 확대하였습니다. 구국의 명장인 사마의에 대비해 아무 것도 이룬 것이 없었던 조상은 이 같은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촉한을 무리하게 공격했습니다. 하지만 촉한의 왕평 등에 의해 침공이 실패하면서 원정을 나갔던 10만 대군이 궤멸되었습니다. 이는 조상의 커다란 정치적 타격으로 이어졌고, 결국 249년에 사마의가 군사정변을 일으켜 위나라의 전권을 장악하게 됩니다. 이후 위나라는 한나라가 그랬던 것처럼 사마씨에 의해 권력이 휘둘리다 265년에 마지막 황제 조환이 사마의의 손자인 사마염에게 선양하며 막을 내리게 됩니다. 한나라가 환관과 외척의 발호로 멸망했고, 위나라는 호족의 성장을 막지 못해 멸망했다고 생각한 사마염은 새로운 왕조인 진나라에서 또 다른 방식을 도입하였습니다. 그는 핏줄에 의존하는 방식을 택해, 사마씨의 직계 황족들을 각지의 군정권을 맡은 왕으로 임명하였습니다. 그러나 사마염이 죽자마자 이는 번왕들 간의 내전인 ‘팔왕의 난’을 불러왔고, 진나라 전역의 군사력이 소진되면서 북방 이민족의 침입을 막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이는 흉노족과 선비족 등 북방 이민족이 북중국을 점령하는 오호십육국 시대의 서막이 되었습니다. 조조와 사마의는 당대 최고의 천재들 중 하나였습니다. 그들이 한나라의 멸망에서 교훈을 얻어 실시한 정책들은 모두 실패로 돌아갔으며, 오히려 파멸로 이어졌습니다. 반면, 유비가 건국한 촉한은 환관과 외척에 일정한 권한을 부여하며 이들과의 공존을 꾀하였습니다. 유비는 한나라 멸망의 원인이 환관과 외척이 아니라 황제의 무능에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는 황제가 뛰어나야 나라가 유지될 수 있고, 황제가 부족하면 그를 보필하는 재상이 뛰어나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이 때문에 유비는 죽기 전 제갈량에게 모든 것을 위임하였고, 유선 또한 이후 재상들에게 모든 군국사무를 맡겼습니다. 그러나 유비조차 현명한 재상들이 지속적으로 나올 수는 없다는 필연적 한계를 간과했습니다. 결국 뛰어난 재상들인 제갈량, 장완, 비의 등이 차례로 죽은 뒤 촉한은 간신 황호의 농간 속에 그 막을 내리고 말았습니다. 이처럼 과거의 교훈을 활용한 반면교사가 항상 정답은 아닙니다. 때로는 기존의 방식을 답습하는 것이, 때로는 완전한 혁신이, 또 때로는 정반합의 방식이 맞을 수도 있습니다. 리더가 자신의 해법만이 정답이라고 생각하면 파멸에 이를 수 있습니다. 리더의 시야는 멀고 깊어야 하지만, 그 범위가 일직선으로 제한되어서는 안 됩니다. 조직을 둘러싼 모든 범위를 살피고, 자신의 생각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며 보완책을 구상하는 것이 리더의 중요한 책무입니다. 조조와 유비, 사마의는 모두 한나라의 멸망을 목격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무너진 체제 속에서 각자 새로운 선택을 해야 했으며, 그 선택의 무게를 온몸으로 느꼈습니다. 완벽한 선택은 있을 수 없지만, 과거의 잘못에 근거한 선형적인 선택이 조직의 장기적인 생존을 보장하지 못한다는 것은 이들의 사례가 명확히 보여줍니다. 리더라면 아프더라도 온몸으로 부딪혀야 하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