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HR 2. 이란 사태와 군주론 : 선택과 자유 그리고 통제(사회학, 정치학) “인문학의 지혜에서 HR 인사이트를 찾다” (2편) 들어가며 : 집단을 이루는 것은 인간의 본능 던바의 숫자라는 것이 있습니다. 인류학자 로빈 던바가 1993년 연구에서 발표한 것이지요. 내용을 간단히 정리하자면, 한 인간이 안정적으로 인간관계를 형성할 수 있는 적정한 사람 수는 150명~200명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을 비롯해 무리 생활을 하는 영장류들은 모두 제각기 이러한 숫자를 가지고 있고, 이 숫자는 뇌의 신피질 크기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합니다. 이에 따라 인간은 150, 침팬지는 65, 고릴라는 33 정도의 숫자를 가집니다. 실제로 야생에서 영장류 무리를 발견하면, 던바의 숫자와 유사한 규모의 무리를 이루고 있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무리의 규모가 이보다 더 커지면 분화하는 경향도 있다고 합니다. 인간 개개인의 힘은 다른 동물들에 비해 당황스러울 정도로 약합니다. 그렇기에 자연 상태에서도 오랜 시간 동안 150명 가까운 무리를 지어 서로 협력하며 살아왔을 것이지요. 또한 더 큰 무리로 뭉쳐 강해지고 싶은 인간의 열망은 종교와 불, 언어 등의 획기적인 도구들을 만났고, 결국 인간은 이를 통해 던바의 숫자를 뛰어넘는 거대한 집단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수만 명, 수백만 명이 한 무리를 이루며 다른 종들을 압도하는, 지구 최강의 종으로서 군림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은 유발 하라리의 유명한 저서, ‘사피엔스’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역사를 돌아보면, 아무래도 인간이 사회적 동물이라는 것은 자명해 보입니다. 우리는 뭉칠 때 강해지고, 더 강한 집단 속에 들어가서 더 단단하게 뭉치고 싶어합니다. 인사 담당자인 우리가 흥미를 가질 만한 부분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인류가 원시적인 무리 생활을 해올 때부터 오랜 시간에 걸쳐 발견해낸, ‘평화로운 집단을 만드는 법’, ‘더 잘 협력하는 법’이 있지는 않을까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변하지 않는 협력과 공존의 기본 원리 말입니다. 이러한 문제에 대해 오래도록 탐구해 온 학문은 바로 사회학과 정치학입니다. 기업은 현대 사회에서 가장 흔히 찾아볼 수 있는 조직의 한 형태이지요. 기업을 운영하는 데에도 기존의 경영학 뿐만아니라 사회학 혹은 정치학의 사유에서 얻을 힌트가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에서 말미암아 오늘 인문학 HR에서는, 이란 사태와 군주론에서 HR의 인사이트를 찾아보고자 합니다. 이란의 히잡 시위, “그래서 쓰겠다는 거야 말겠다는 거야?” 작년 말 이란의 대규모 반정부 시위가 커다란 이슈가 되었습니다. 9월 중순, 마흐사 아미니라는 젊은 여성이 히잡을 제대로 착용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종교 경찰에게 잡혀간 후 의문사했습니다. 이 사건이 불씨가 되어 강압적인 이슬람 원리주의 정권에 대해 쌓여 온 그 간의 분노가 폭발한 것이지요. 히잡 착용을 거부하는 이 시위에는 여성과 젊은 남성들, 이란의 최대 산업인 에너지 산업 노조 등 다양한 세력이 참여하며 100일이 넘게 이어졌고, 한 때 이란 정권을 무너뜨릴 것이라는 예상이 이루어질 정도로 뜨겁게 달아올랐습니다. 정부의 강경 진압과 사형 집행으로 수백 명이 사망하고 수천명이 다쳤고, 경제난까지 심각하게 악화되어 현재 거리의 시위는 잦아들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여성들은 여전히 히잡 착용을 거부하며 조용한 항전을 계속하고 있어, 이란의 거리는 시위 이전과는 크게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란의 히잡 관련 시위 역사에 대해 조금 더 알아본다면 의아한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과거 팔레비 왕조 시절 이란 여성들은 정부의 강건한 히잡 착용 금지령에 저항하여, 히잡을 착용하기 위해 격한 시위를 벌인 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이란 여성들이 최근에는 히잡을 벗기 위해 목숨을 건 투쟁을 벌인 것입니다. 어찌된 일일까요? 그리고, 이러한 풍경은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지 않은가요? 인사제도를 개편했을 때에도 가끔씩 구성원들의 예상치 못한 반응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가령 공동연차 소진제 등 어떤 인사제도를 만들었을 때 비슷한 입장일 줄 알았던 사람들의 선호가 나뉘기도 하고, 같은 제도를 놓고도 시기에 따라 그 선호가 변화하기도 합니다. 제도를 만든 입장에서는 답답한 노릇이지만, 조직의 맥락을 잘 살펴보고 진단해본다면 그 원인을 이해할 수 있지요. 이와 같은 자세로 이란 히잡 시위의 맥락도 조금만 더 자세히 들여다보겠습니다. 이란 히잡 시위의 맥락 사실 히잡 형태의 베일은 중동에서 이슬람이 시작되기 전부터 있던 오래된 의복으로, 남자나 여자를 가리지 않고 입던 사막의 생존 필수품이었습니다. 이슬람이 태동한 이후에는 ‘성적인 매력을 가리고 경건한 마음으로 종교 의례에 임한다’는 종교적 의미가 더해지기는 했으나, 역시 남녀를 가리지 않았습니다. 여러분도 한 번쯤 위 그림과 같이 무슬림 남성들이 흰 모자와 헐렁한 의복을 착용한 모습을 보신 적이 있을 겁니다. 사실 문화권을 초월하여 머리카락을 가리는 종교적 의복은 거의 모든 종교에 있습니다. 수녀들이 입는 수녀복이나 터번도 이와 같다고 할 수 있지요. 남성과는 달리 여성들의 히잡 착용은 그들의 성적 매력을 감추기 위한 용도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역시 이슬람만의 전유물은 아닙니다. 여성의 성적 매력을 국가 차원에서 통제하는 건 과거엔 세계적으로 흔한 일이었습니다. 유럽 여성들도 후드 형태의 모자를 착용했으며, 우리나라도 일제강점기까지 장옷으로 여성의 매력을 감춰왔습니다. 오랜 세월 유목생활을 하며 무법천지였던 중동의 역사 속에서, 이는 과거 여성들을 보호하기 위함이기도 했습니다. 이렇듯 무슬림 여성들에겐 오랜 시간 동안 익숙해져온 터라 히잡이 불편하지도 않을뿐더러 억압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20세기의 히잡은 서구 세계의 식민주의에 대한 저항의 상징이기도 했지요. 서구 열강의 꼭두각시 정부들이 근대화를 빌미로 각국의 전통문화를 약화시키기 위해 히잡 착용 금지령을 내리면, 이에 저항하기 위해 진보적인 여대생들을 중심으로 한 여성들이 히잡을 입었습니다. 알제리에서는 여성들이 히잡 속에 무기와 비밀문서를 숨겨, 알제리의 독립에 지대한 공헌을 하기도 했지요. 이 덕분에 히잡에는 민족을 위해 여성들이 주체적으로 큰 역할을 다했다는 자부심이 더해지기도 했습니다. 그러니 서구 세계가 히잡을 단순히 여성 억압의 장치로만 치부해버리는 것을 무슬림 여성들이 달갑게 여기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히잡 착용이 인권 탄압의 문제로 불거진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입니다. 20세기 중엽 중동 국가들은 수 차례에 걸친 이스라엘과의 ‘중동 전쟁’에서 뼈아픈 패배를 하며 큰 충격을 받았고, 그 책임을 당시의 세속주의 정권들에 돌렸습니다. 사람들은 패배의 원인을 신앙심 부족에서 찾았고 결국 이후 중동엔 강경한 이슬람 원리주의 정권들이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이란 역시 그 중 하나였고, 이 때부터 극단적인 종교적 원칙을 내세우며 여성의 히잡 착용을 강요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과거의 히잡 착용 운동과 지금의 히잡 반대 운동. 두 운동에서 문제의 본질은 히잡의 착용 여부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옷을 입을 여성들의 의견은 완전히 배제하고, 권력층이 자신들의 의중대로 극단적인 탄압의 명령을 내렸다는 것입니다. 두 시대의 사건 모두 국가 권력이 의복의 자유을 비롯한 국민들의 자유를 박탈하려 했고, 국민들이 이에 저항했다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같습니다. 히잡은 거기에서 나타난 하나의 저항 수단이었을 뿐입니다. 자유를 갈망해 온 인간의 역사 무언가에 강제로 속박된 상태로 살고 싶어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인간은 자유를 갈망합니다. 세계의 정치 형태도 일반적으론 왕정에서 공화정으로, 또 민주정으로 차츰 발전해왔지요. 우리는 민주주의 지수가 높은 국가들을 ‘정치적으로 발전된 국가’라고 평가하고, 투쟁을 통해 자유와 민주주의를 쟁취해낸 국민들은 그에 대한 자부심을 갖습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시스템 속에서도 우리는 여전히 일부 통제를 따르고는 있지만, 이는 우리가 삶의 편의를 위해 직접 합의한 권력, 우리가 선택한 정권에게 자발적으로 따르고 있다는 점에서 과거의 사람들과 차원이 다릅니다. 이렇게 보면 우리가 찾던, 협력과 공존의 기본 원리를 드디어 발견한 듯도 합니다. ‘선택권을 주어라. 사람은 강제성이 있을 때 저항하고, 자발적인 합의가 있을 때 어느 정도의 통제에도 기꺼이 따른다.’ 사실 당연한 만큼 식상한 이야기일 수 있고, 문화권을 초월한 ‘성군이 되는 법’의 기본이자 현대에서도 ‘좋은 리더가 되는 법’의 기본 메시지입니다. 대척점의 목소리들 - 마키아벨리즘과 군주론 그렇다면 왜 세계엔 이란 사태와 같은 일들이 벌어질까요? 왜 인간을 자유로운 선택권을 줄 대상이 아니라 통제하고 억압해야 할 대상으로 보는 걸까요? 사리사욕을 채우려 하는 부패한 정권이 아닌 이상 어떤 정치인들도 나라를 잘 운영하고 싶어할텐데 말입니다. 저는 인류의 역사 속에서 인간을 통제의 대상으로 보는 목소리도 꾸준히 있어 왔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목소리들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15세기 니콜로 마키아벨리의 저서 ‘군주론’입니다. 군주론은 ‘악마의 책’이라고도 불려왔습니다. 훌륭한 군주가 되기 위해서는, 인간이 약하고 위선적이며 탐욕스러운 존재라는 가정을 기반으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권모술수와 공포 정치를 행해야 함을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이후 독재자 히틀러와 무솔리니가 이 책을 탐독했다는 사실과 맞물려 이러한 측면은 더욱 강조되었고, ‘정치적 목적을 위해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아야 한다’는 말로 정리되는 마키아벨리즘은 비판의 대상이 되어왔습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군주론의 유명한 구절들 중 일부를 가져왔습니다. 민중이란 다정하게 대해주거나 철저하게 파멸시켜버려야 한다. …무릇 인간이란 작은 모욕에는 반격하지만 크게 짓밟히면 반격할 엄두를 못 낸다.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사랑받는 것보다는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 편을 선택하는 것이 훨씬 안전하다. 인간이란 본디 감사할 줄 모르고 신뢰할 수 없으며, 돈을 탐하고 위험이 닥치면 도망쳐 버리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지금까지 고전으로 회자되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세계 명저 목록이나 대학생 필독서 목록에서 빼놓지 않고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사실 집단이 사람들을 통제하여 한 방향으로 가면 단기적인 일의 효율성 면에서는 확실한 효과를 볼 수 있는 것도 사실이지요. 또 이 책의 리뷰들을 보면 ‘착하기만 한 사람이라면 읽어봐야 한다’, ‘정의고 선의고 간에 리더라면 살아남는 원초적인 방법이 적나라하게 잘 나와 있다’ 등 책의 내용에 대해 동의하는 듯한 의견들도 꽤나 많이 보입니다. 그럼 우리는 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정말 인간은 여러 면모를 갖고 있기 때문에, 자유와 선택권의 관점으로 집단을 바라볼 수도 있지만, 억압과 통제의 관점으로 움직이는 집단도 나름의 방식대로 잘 작동하는 것일까요? 사실 인류 역사의 음지 속에서 불신과 통제의 관점도 꾸준히 두텁게 발전해온 걸까요? 마키아벨리의 맥락 우리가 앞에서 이란 사태를 차분히 분석하여 진단했듯이, 마키아벨리의 맥락도 들여다볼 필요가 있습니다. 15세기 이탈리아는 수많은 국가로 사분오열되어 극심한 혼란을 겪고 있었습니다. 이 국가들은 주변의 강대한 국가들과 이웃 도시국가들에게 수시로 침공당하며 고통을 받아야 했습니다. 마키아벨리가 태어난 피렌체공화국도 인구 7만의 힘없는 작은 도시국가들 중 하나였죠. 마키아벨리는 어린 시절부터 외교관으로 장성할 때까지 로마교황국, 나폴리공화국, 프랑스와 스페인으로부터 침략을 당하는 경험을 했습니다. 외교관 마키아벨리가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군주는 정의롭고 신의를 지키며 덕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을까요? 아마도 그보다는 냉혹한 현실에서 살아남기 위해 정의고 신의고 덕은 제쳐두고 냉혹하게 싸워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마키아벨리 주장의 기틀은 사실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습니다. 다수의 민중은 지배받지 않으려 할 때 가장 건강하고, 지배하려는 본성을 지닌 소수의 가진 자는 스스로의 본성을 억누르고 다수의 민중이 지배받지 않도록 하려는 목적에 헌신할 때 가장 훌륭하다. 마키아벨리는 강력한 지도자가 출현해 이탈리아 통일을 이룩해주기를 바랬습니다. 실제로 민중을 공포와 권위로 굴복시키는 것이 이상적이라고 생각한 것이 아니라, 당시 백성들에게 닥친 가혹한 운명을 헤쳐나가기 위해선 극도로 현실주의적이고 냉정한 노선이 필요하다고 주장한 것이지요. 군주론이 지금까지도 명저로 회자되는 이유는 두 가지 때문입니다. 책 곳곳에서 당시의 국제 정세에 대한 날카로운 분석력과 냉철한 판단력이 빛났고, 당시 지배적이던 기독교 기반의 이상적 정치 철학과 완전히 배치되는, 극도로 현실주의적인 정치철학이 매우 파격적이었기 때문입니다. 군주론은 당시로서도 사람들이 받아들이기 힘든 내용이었기 때문에, 마키아벨리의 사후 5년 후에야 정식으로 출간될 수 있었습니다. 16세기 프랑스에서는 ‘이탈리아 사람이 이렇게 폭력적인 사상을 가진 책을 썼다’며 이를 정치적인 공격 수단으로 활용했습니다. 근대 사회에서는 루소와 스피노자와 같은 사상가들이 군주론을 ‘난폭한 권력자들을 에둘러 비판하는 글이다’라고 평가하기도 했습니다. 역사적으로도 ‘약속을 지키지 않는 난폭한 리더가 되라’는 군주론의 표면적 메시지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공감한 사람들보다는 비판적으로 받아들인 사람들이 항상 많았던 것입니다. 만약 현대에 군주론을 읽으며 그 표면적 메시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이를 자신의 일상과 사회생활에 그대로 대입하려는 어리석은 사람이 있다면, 히틀러나 무솔리니와 같이 좋지 않은 결말을 맞을 가능성이 높을 것입니다. 자유와 통제. 우리 기업들이 가진 인간관은? 그럼 마지막으로 우리 기업들이 갖고 있는 인간에 대한 관점을 돌아보겠습니다. 경영에서는 구성원들을 자유로운 선택권을 줘야 할 주체적인 존재로 바라보나요, 아니면 통제의 관점으로 바라보나요? 경영에서의 인사관리는 효율적인 관리를 강조하는 테일러리즘에서 시작했습니다. 기본적으로 임직원을 통제와 관리의 대상으로 보는 시각이 짙습니다. 이후 1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많은 경영 방법론들과 기법들이 소개되었지만, 이들을 관통하는 하나의 패러다임은 테일러리즘이었다고 평가하기도 합니다. 테일러리즘은 강력한 통제와 명령, 규율을 강조하면서 꾸준히 ‘정상 경영’의 자리를 지켜왔습니다. 그러는 동안 정치 철학에서는 19세기와 20세기에 걸쳐 서서히 자유주의 사상이 깃들고 발전을 거듭해, 세상에 실제 민주사회들을 탄생시키는 변화를 이끌어내기도 했습니다. 어쩌면 기업들의 인간상이 사회의 인간상을 잘 따라가지 못하고 있던 건 아닐까요? 최근에 들어서는 선도적인 기업들로부터 인간을 주도적이고 개성적이며 책임감 있는 존재라고 바라보는 ‘Y이론’적 관점, 혹은 ‘애자일’ 철학이 빠르게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어쩌면 정치에서도 다른 제반 여건들이 충분히 마련되었을 때 안전하게 자유민주주의로 이행할 수 있듯, 비즈니스에도 이제 인간에 대한 관점을 전환할 수 있을 만한 사회적 여건이 마련되었기에 이러한 철학들이 퍼져나가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이러한 맥락과 흐름을 인지하고 시대를 역행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란의 강압적인 독재 정권을 시대착오적이라며 비판하면서도, 회사에 가서는 고전적인 인간관 때문에 직원들과 히잡같은 문제로 옥신각신 하고 있지는 않나요? 아니면 혹시 군주론을 표면적으로만 읽은 사람처럼, ‘사람은 원래 공포로 통제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스스로에게 되뇌이며 강화하고 있지는 않은지요? 지혜롭게 인간다운 집단을 만들기 위해 물론 사회학, 정치학의 논의를 곧이 곧대로 기업의 경영에 대입할 수는 없습니다. 국가/사회와 기업은 본질적인 차이가 있지요. 전자의 목적은 국민들이 경제적으로 번영하고 문화적인 꽃을 피울 수 있는 안전한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이고, 후자의 목적은 이윤을 창출하는 것입니다. 민주주의에서 모든 주권과 선택/책임이 국민에게 가듯이, 기업에서 모든 선택/책임이 직원에게 갈 수는 당연히 없습니다. 지난 시간에 이야기했듯이, 기업은 단 하나의 목적을 위해 모두가 유기적으로 협력하여 움직이는 유기체와 같습니다. 이러한 조직에서 구성원들은 오장육부와 같이 저마다의 역할을 다합니다. 이러한 구성원 개개인에게 뇌(전략 조직)가 해야 할 모든 선택권을 주는 것은 부적절합니다. 다만 적절한 조직화(제도와 룰) 속에서, 구성원들이 각자의 영역에서 적절히 발휘할 수 있는 자유(선택권과 창의성 발휘)를 누릴 수 있도록 균형을 잡아주어야 할 것입니다. 관건은, 그 과정 속에서 구성원들이 정말 신체의 일부분처럼 자유의지가 없이 기능만 하는 존재가 아니라, 사실은 민주사회를 살아가는 자유롭고 주체적인 인간이라는 점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이들이 삶의 통제감을 충분히 느낄 수 있을 만큼 선택권과 자율성을 보장해주는 게 바로 가장 인간다운 집단을 만드는, 사회학/정치학이 줄 수 있는 지혜일 것입니다. 참고자료1 : 지식 브런치 - 이란 사태로 본, 히잡에 관해 오해하기 쉬운 4가지 https://www.youtube.com/watch?v=7RUTk95etNo 참고자료2 : 5분 뚝딱 철학 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001937686 “인문학의 지혜에서 HR 인사이트를 찾다” (심리)도파민과 세로토닌 : 우리 조직의 철학엔 이 호르몬들의 함량이 어떠한가? (사회)이란 사태와 군주론 : 선택과 자유 그리고 통제 (역사) (문학) (미술) (철학) (최초 업로드 : 2023.2.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