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년 전 그로스해킹 교육을 들었습니다. 당시 PR 담당자였던 저는 레거시 미디어가 주는 불확실함과 모호함에 강한 의문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TV에 방송이 나가도 누가 봤는지 정확히 알 수 없고, 신문에 기사가 실려도 사업에 도움됐는지 알 길이 없었으니까요. 그런 홍보가 불필요하다는 말은 아니지만, 제 눈에 레거시 미디어는 ‘대중’이라는 말에 숨어 성과 측정 자체를 거부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렇다 보니 숫자로 말하는 퍼포먼스 마케팅에 자연스럽게 관심 갖게 됐고, 그로스해킹이 핫하다는 소문에 바로 입문반을 신청했습니다. 저는 교육을 다 듣고나면 마케팅을 편리하게 할 수 있는 프로그램 사용법이나 유입과 전환을 이끌어내는 실무 팁 같은 것들을 배우게 될거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알고 보니 그로스해킹은 Tool 이 아니라 사고의 방식, 그 자체를 의미하더군요. 산업이나 직무와 관계없이 가설을 세우고, 검증하고, 개선하는 사이클을 빠르게 반복하는 것이 곧 그로스해킹이었습니다. 다만 그런 전술적 특성이 마케팅과 잘 맞아떨어지다 보니 마케터들 사이에서 인기를 끌었던 것이고요. 뜬금없이 이런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애자일이 인기를 끌고 있는 현 상황과 마케터들이 너도나도 그로스해킹을 배우겠다 나선 작년 상황이 굉장히 유사하다 느꼈기 때문입니다. 최근 수많은 임원들이 우리 조직에도 애자일 같은 ‘것’을 도입해야 되지 않겠냐 말합니다. 글로벌 기업의 CEO들이 전통을 깨고 혁신을 만드는 데 애자일이 한 몫 했다고 말하는 인터뷰를 본 것이죠. 한국에서 애자일은 도입만 하면 경직된 조직문화와 수직적 업무 방식를 타파할 수 있는 비책처럼 포지셔닝 되어있습니다. 그로스해킹 때처럼 혼란함을 느낀 저는 애자일의 ‘진짜’ 실체가 궁금했고, 국내 최고의 애자일 전문가들이 나온다는 <Wanted Con: Agile&Beyond>를 신청해 들어보게 됐습니다. 이틀동안 진행된 8개 세션과 2번의 패널 토론. 인상적인 세션이 참 많았습니다. 실제 현업에서 애자일을 다루고 리딩하는 전문가들이 나오는 컨퍼런스였으니까요. 저는 그중에서도 구체적인 사례와 함께 실무에 적용할 수 있는 애자일 노하우를 알려주신 정진영 PO님, 전략이라는 추상적 개념을 하나씩 그려 나갈 수 있도록 방법론을 제시해준 홍영기 코치님의 세션을 가장 인상깊게 봤습니다. 두 세션에 대한 리뷰를 시작합니다. <고객의 마음을 얻기 위해 어디까지 해봤니?> - 정진영 11번가 PO 저는 이전 직장에서 대학생 대상으로 SNS를 운영하는 일도 했습니다. SNS는 관련 지표들이 데이터로 쌓이기 때문에 비교적 성과 측정이 쉽습니다만, 대학생들이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고 내 콘텐츠에 어떤 느낌을 받아 ‘좋아요’를 누르는지는 알 수 없었습니다. 그 때 친한 선배가 FGI를 돌려보라는 조언을 줬고 저는 어설프게 가설을 세워, 조사를 설계하고, 타겟을 추출해 인터뷰를 진행한 경험이 있습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습니다. FGI를 통해 일방적으로 콘텐츠를 찍어내던 방식에서 탈피할 수 있었고, 대학생들의 의견을 적극 반영해 콘텐츠를 제작하니 성과도 더 잘나오게 됐습니다. 다시 말해 대학생들의 마음을 얻은 것입니다. 정진영 PO님이 말하는 고객의 마음을 얻는 과정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현재 무엇이 불편하고, 어떤 새로운 것을 원하는지 귀를 기울이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를 위해 업무 방식을 애자일하게 뜯어 고친 실제 사례를 들려주셨습니다. 최근 11번가는 최소한의 스펙으로 서비스를 만들어 일단 시장에 내놓은 다음 검증하는 것으로 출시 기준을 바꿨다고 합니다. 기존 서비스들이 10개월의 긴 텀을 두고 개발됐던 것과 비교하면 대단한 변화입니다. 서비스를 빠르게 내놓기 위해 기획과 디자인을 동시에 하고, 베타테스트와 배포도 단 1개월 만에 진행한다고 합니다. 정진영 PO님이 예시로 든 동영상 리뷰 기능도 실제 그런 방식으로 탄생되었습니다.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속담은 11번가에 적용되지 않습니다. 불확실함으로 가득 찬 같은 시대에 정답은 없고, 빠르게 시도하며 지름길을 찾는 방식이 더 효율적이라 판단한 것이죠. 이 것이 11번가만의 애자일이었습니다. 이런 방식은 제품을 개선하는데도 적용됐다고 합니다. 정진영 PO님은 VOC 듣기, User Test 하기, A/B Test 하기 등 다양한 방법으로 고객들의 피드백을 모으고, 우리가 세운 가설을 검증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모든 과정이 중요하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 검증을 강조했습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어떤 상품의 상세 페이지를 들어가니 ‘판매 BEST 1위’라는 스티커가 붙어 있습니다. 이 제품은 스티커가 붙어있지 않은 타제품보다 판매가 조금은 더 잘 될 것이라는 예측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예측에 누가 돈과 시간을 걸 수 있을까요? 모든 상황엔 변수가 있고, 모든 일이 예측한대로 굴러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 실제로 스티커가 붙은 제품이 더 많이 팔리는지 실험을 돌려 숫자로 검증한다면 예측은 힘을 받습니다. 조직 내 의사결정에 있어서도 가설로 이야기하는 것과 검증된 데이터로 이야기하는 것은 큰 차이가 있습니다. 정진영 PO는 어떤 방식이든 좋으니 고객들의 니즈를 파악하고 검증한 뒤 그 안에서 인사이트를 찾아내보라 말합니다. 그것이 곧 우리 시대의 가장 애자일한 방식이라고요. .- – 홍영기 네오위즈 플레이 스튜디오 애자일 코치 전략을 짜오라는 말만큼 주니어에게 막막한 오더가 있을까요? 홍보팀 막내였던 저에게 홍보 전략을 수립해오라는 팀장님의 숙제는 너무나 어려웠고, 결국 제가 가져간 결과물은 요즘 가장 트렌디한 채널과 콘텐츠들을 쭉쭉 나열한 뒤 ‘우리 회사도 이렇게 해보면 좋겠다’, ‘그러려면 예산이 이만큼 듭니다’로 끝나기 일쑤였습니다. 홍영기 코치는 번뜩이는 아이디어 만으로는 성취하기 어렵고, 매 순간 치열한 고민과 전략적 선택들이 차곡차곡 쌓여야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말합니다. 어느 기업이든 홈페이지에 들어가면 미션과 비전이 있습니다. 미션과 비전은 그 회사가 할 수 있는 가장 큰 성공을 보여줍니다. 일반 사람에게는 허울좋은 그림이라 생각할 수도 있지만, 홍영기 코치는 전략을 짬에 있어 가장 먼저 해야할 것이 미션과 비전을 세우는 것이라 말할 정도로 중요합니다. 우리 조직, 우리 제품이 이 세상에 존재해야 하는 이유를 발견하고, 그 이유를 고객과 구성원들에게 납득시켜야 된다는 것이죠. 미션과 비전이 없는 회사는 길을 잃기 마련입니다. 성공이라는 산을 넘는 과정에서 일종의 북극성이 되어 나아가야할 방향을 알려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미션과 비전을 만드는 것이 전략의 첫 걸음이라고 말합니다. 미션과 비전으로 최종 목적지를 정했다면,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는 등반로를 개척해야 합니다. 등반로는 직선일 수도, 꼬불꼬불 둘레길일 수도 있습니다. 중간중간에 쉬어가야 할 캠프가 여러 개 있을 수도 있고요. 이런 등반로를 찾는 방법엔 답이 없습니다. 다양하게 열어놓고 시험해 보면서 조직이 스스로 만들어가야 한다고 합니다. 여기까지만 들으면 다소 막막한 이야기인데요. 홍영기 코치는 전략적 옵션을 쉽게 만들 수 있는 캔버스 툴을 대안으로 제시합니다. 캔버스 안에 있는 5개의 질문에 차례대로 답하다보면 우리가 나아가고자 하는 전략을 도출해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what is our winning goals and aspirations from vision (우리가 열망하는 승리의 목표는 무엇인가) where we will play to win (승리하기 위해 경쟁할 영역이 어디인가) how we will win (이 영역에서 이기기 위해 어떻게 할 것인가) what capabilities must be in place (이기기 위해 필요한 역량은 무엇인가) what management systems are required? (이를 위해 어떤 경영 시스템이 필요한가) 다만, 주의할 점이 있습니다. 캔버스 내용을 채우기 위해 짜맞추려 들지 말고, 캔버스 자체를 구성원들과의 대화 수단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구성원들과 Align 되지 않은 전략은 올바르게 실행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도출한 전략이 현실이 되기 위해 실현되야 하는 ‘숨겨진 가정’, 즉 Strategy Validation이 무엇인지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속한 산업군, 우리 고객이 느끼는 가치, 우리 경쟁사의 대응, 우리가 가진 경쟁력 등 Strategy Validation은 무수히 많은 곳에 발견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홍영기 코치는 이런 전략의 여정을 하나의 큰 그림, Framework로 살펴보라고 말합니다. 전략이 전략으로만 머무르지 않고, 현실화될 수 있도록 말이죠. 멀리서 보면 웅장하고 멋진 산도 한 걸음씩 나아가는 발걸음이 있어야 의미가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어려운 길을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고민하라고 독려하며 세션을 마무리 합니다. .- <Wanted Con: Agile&Beyond>을 듣고 나니 막막했던 애자일이 조금은 친숙해진 느낌입니다. 결국 애자일은 그로스해킹과 마찬가지로 일하는 방식 그 자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급변하는 환경에 맞춰 조직과 구성원 모두가 유연하게 의사결정 하는 것, 그리고 의사결정에 대해 빠르게 검증하고 반복적으로 시도하는 것 말이죠. 그렇다면 애자일을 우리 조직에 어떻게 도입할 수 있을까요? 많은 임원분들이 밀레니얼 세대의 직원들이 섞인 TF를 만들거나 슬랙, 지라 같은 메신저 도입, 영어로 호칭하는 직급 폐지 같은 것들로 애자일을 오해하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 애자일이라는 의사결정 안에 본인의 변화는 포함되어 있지 않지요. 저 역시 작년 그로스해킹 교육을 듣고 좌절감에 가득했습니다. 우리 회사가 그로스해킹을 전혀 할 수 없는 조직이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거든요. 제가 그로스해킹을 이해했다고 해서 실제 조직에 그로스해킹을 도입할 수 있느냐, 그건 완전 별개의 일이었습니다. 애자일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일부 업무에 적용해볼 수 있겠지만, 조직 전체가 애자일하게 변화하려면 개인의 노력으로는 어렵습니다. 만약 11번가 임원이 서비스 제대로 갖춰서 내라고 호통 쳤다면 어땠을까요? 아마 서비스를 내기도 전에 고객들의 니즈는 또 바뀌었을 것이고, 직원들이 열심히 준비한 서비스가 헛발질로 끝났을 것입니다. 모순적인 말 같지만 애자일이야말로 탑 다운으로 내려와야 안착할 수 있습니다. 개인은 자신의 영역 안에서 작더라도 끊임없이 시도하고, 조직은 큰 변화를 위해 위에서부터 움직이는 것. 이 것이 애자일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일 것입니다. by 박새봄 (HR Ambassador 1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