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은 미디어이자 메시지이다. 그 사실을 극명하게 깨닫게 되는 순간은 누군가의 하객이 되어야 할 때가 아닐까. ‘그날 뭐 입지?’라는 질문은 사실은 이런 질문과 같다. ‘그날 뭘 입으면 오랜만에 만날 사람들에게 ‘나 잘 지내’를 표현하지?’ 결혼식 뿐 아니라 매일의 일상에서 우리는 옷으로 나를 표현한다. 여기서 ‘나’란 ‘누군가에게 잘 보이고 싶어 하는 사회적 인간’일 수도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마슬로우의 욕구 위계 꼭대기에 존재하는 ‘자아실현을 하려는 사람’이다. 지난 1월부터 나는 나를 찾는 플랫폼 ‘밑미’(Meet me)에서 ‘나만의 패션 스타일 찾기’라는 리추얼을 진행하고 있다. 내가 의도한 이 리추얼의 목표는 ‘나 자신도 몰랐던 나의 패션 욕망에 눈뜨는 것’이다. 4주간 내가 매일 질문을 던지면 참여자들은 글과 사진으로 질문에 답한다. 리추얼 첫 주에 내가 던지는 질문은 옷과 무관한 질문, 더 정확히는 자신의 욕망 발견을 돕는 질문이다. 평소 누굴 멋있다고 느껴왔는지, 어떤 컨텐츠를 오랫동안 좋아해 왔는지, 어떤 물건을 반복적으로 사거나 오랫동안 간직해 왔는지. 만난 지 얼마 안 된 연인의 질문이라도 받은 듯, 다들 자기 이야기를 풀어놓으며 신이 난다. 리추얼 중반에 내가 던지는 질문은 자신의 옷장을 들여다보아야 답할 수 있는 질문이다. 어떤 옷을 방치했는지, 어떤 옷에 손이 가는지. 참여자들은 불편한 옷과 안 어울리는 옷이 무엇인지는 쉽게 풀어 놓는다. 누군가에 의해 어울리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 피한다는 옷, 입고 싶지만 자신이 입으면 절대 느낌이 살지 않는 옷, 안 어울리는 색상의 옷... 리추얼 마지막 주가 되었을 때 내가 던지는 질문은 이런 것이다. ‘나를 행복하게 하는 옷은 무엇인가요?’ 참여자 중 한 분이 질문은 처음에 이렇게 반문했다고 한다. “옷에서 ‘행복’이라고? 그게 가능해?” 매일 옷을 입지만 옷과 행복을 연결시켜볼 생각은 하지 못하셨다는 거다. 많은 참여자들이 ‘설렘 포인트’, ‘행복’이라는 표현을 옷과 연결 짓는 것을 상당히 어려워한다. 스스로의 욕망을 들여다보고 그 욕망을 옷이라는 사물과 연결시키기. 어렵다. 또 옷은 자신의 욕망보다 타인의 시선을 먼저 연결 짓게 되는 대상이기도 하다. 우리가 옷을 사고, 오래 간직하고, 즐기며 입는 단계에 도달하는 것이 어려운 건 자신의 욕망에 집중하기 어려워서다. 과거에 ‘음식’이란 건 배를 불리면 그만인 것이었다. 지금 우리에게 음식은 그 이상의 위상을 갖는다. 위안을 주는 음식에 기꺼이 ‘소울 푸드’라는 이름을 선사하기도 하니까. ‘옷’은 어떨까. 추위를 면하게 하면 그만인 것, 출근할 때 트집 잡히지 않으면 그만인 것, 특정 TPO 드레스 코드에 맞추어야 하는 것. 지금 우리에게 옷이 아직은 이 이상의 위상을 갖지 못한 것 같다. 패션을 힐링과 연결시켰다는 이유로 내가 독특한 사람이란 시선을 받는 걸 보면. ‘소울 푸드’가 누군가의 전유물이 아닌 건 특별한 사람들만 음식을 먹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음식을 먹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배를 불리는 단계를 거쳐 ‘행복’을 맛보는 단계로 나아간다. 마찬가지로 난 ‘힐링 패션’이 누군가의 전유물은 아니라고 믿는다. 특별한 사람들만 옷을 입는 것이 아니니까. 옷을 입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TPO에 맞춰 꾸역꾸역 입던 단계를 거쳐 ‘행복’을 입는 단계로 나아갈 자격이 있다. ‘나만의 머스트 해브 아이템은 무엇인가요?’ 내가 리추얼 마지막 주에 던지는 질문 중 하나이다. 이 질문에 어느 분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지금까지 저는 전문가들이 말하는 머스트 해브 아이템을 옷장에 채워 넣을 생각만 했어요. ‘나만의’ 머스트 해브 아이템이 무엇인지는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네요.” 소울 푸드가 사람마다 다르다면 냉장고에 들어가야 하는 식료품도 사람마다 다른 법. 힐링 패션도 사람마다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럼 옷장에 꼭 들어가야 하는 옷도 사람마다 다르지 않을까. 나는 꽤 오랫동안 전문가들이 ‘머스트 해브 아이템’으로 추천하는 트렌치코트를 방치했었다. 매년 새 트렌치코트를 샀지만 결과는 같았다. 핏이 안 맞았던 걸 수도 있고, 길이가 불편했던 걸 수도 있고, 소재가 맘에 안 들었을 수도 있었겠다. 그러나 방치된 옷과 내가 행복한 지점을 돌아보며, 트렌치코트가 나의 ‘힐링 패션’에 필요한 옷은 아님을 알게 되었다. 자유로움을 추구하는 난 트렌치코트가 너무 격식을 갖추어 불편하다 여겨왔던 것이다. 봄/가을에 트렌치코트 대신 자주 손이 갔던 아우터는 데님 재킷이다. 이제 내가 옷장을 열면 다양한 핏, 길이, 색상, 디자인의 데님 재킷이 나를 반긴다. 데님 재킷은 나의 ‘힐링 패션’을 가능하게 하는 ‘나만의 머스트 해브 아이템’이다. 내가 ‘TPO에 맞추기’보다 먼저 고려하는 것은 ‘나를 행복하게 하는지’이다. 나를 행복하게 하는 옷들로만 옷장을 채워놓고 그 중에서 TPO에 맞는 옷을 꺼내어 입고 나간다. 미팅이 있는 날은 워싱이 없고 절제된 디자인의 데님 재킷을 입는다. 리추얼 참여자들의 옷장에서 방치된 옷의 상당수는 특정 TPO에 맞추기 위해 산 옷이었다. ‘나를 행복하게 하는지’보다 ‘TPO에 맞추기’를 우선시한 결과 그 옷들은 비싼 1회용 옷이 되어 있었다. 좋아하는 사람과 행복한 시간을 보낸 사람은 얼굴에서 빛이 난다. 좋아하는 옷을 입은 사람의 얼굴에서도 빛이 난다. 좋아하는 옷을 입고 미팅에 가면 빛나는 얼굴로 상대방을 맞을 수 있다. 나를 행복하게 하는 옷이 반드시 TPO에 어긋나거나 일의 성취를 그르치는 건 아니다. 난 오히려 그 반대가 된다고 믿는다. 옷이 퍼스널 브랜딩에 확실한 날개가 되는 경우라면 더더욱. 자신의 가장 본질적인 욕망이 무엇인지 알고, 그 욕망을 표현할 옷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 ‘머스트 해브 아이템’이 아니라 ‘나만의’ ‘머스트 해브 아이템’을 입는 사람. 빛나는 얼굴로 일도 잘 하는 사람. 그 사람이 바로 ‘옷 잘 입는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