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명한 하늘 바람이 얼굴을 날 서게 내려칠 때면 살아 있음을 느낀다. 오감을 통해 전해 오는 감각의 자극이 크면 클수록 나는 살아 있음을 느낀다. 고통도 그중 하나이고 기쁨도 그중 하나이다. 고통과 가쁨은 정 반대의 감정으로 고통은 피해야 할 것, 기쁨은 추구해야 할 것으로 인식하지만 매우 단순한 생각 파편이다. 기쁨은 고통이 있기에, 고통은 기쁨이 있기에 공생한다. 둘 중 하나가 없으면 둘 다 없다. 그래서 우리는 기쁨을 추구하고 고통을 피해 가면서 살아도 되지만 웃긴 일임은 분명하다. 그나마 현명한 방법은 기쁨 따위 고통 따위 신경 쓰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다. 기쁨을 기쁨이라 이름 붙이지 말고, 고통을 고통이라 이름 붙이지 말고. 그 순간의 쾌락과 아픔에 일희일비하지 말고 그냥 사는 것이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모든 것은 지나가기에 붙들고 살려는 욕망은 신기루에 불과하다. 그냥 살아가는 것이 가장 좋은데 어떤 이들은 이러한 삶은 자극이 없어 지루할 것 같다고 성급하게 결론 짓는다. 각자의 삶을 살면서 겪은 경험이 모두 다르기에 나의 경험으로 누군가의 경험을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단지 공감하려고 노력할 뿐, 노력한다고 해서 공감되는 문제는 아니다. 공감하는 척, 아는 척 하지만 우리는 절대 누군가의 삶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이렇게 개인은 모두 자신만의 세상'만' 살아갈 수밖에 없다. 각자의 세상에서 살다 보면 개인과 개인의 삶이 수만 번 겹치는데 이때 생겨나는 작은 중첩으로 우리 사회가 구축된다. 중첩되는 만남으로 인해 서로의 경험이 공유되고, 공유된 경험 속에 중첩되는 고통과 기쁨이 합의를 이루면 공통된 믿음을 만들어 낸다. 공통된 믿음이라는 것이 섬세하지 못하고 거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의 경험이 중첩되려면 도드라져야 하고, 도드라진 것 끼리 중첩된 부분이 사회를 구성하는 기본 토대가 되니 그러하다. 개인의 경험이 조금 더 섬세하게 표현되고, 별 다른 중첩 없이도 각자의 삶이 사회에 오롯이 반영될 수 있다면 우리 사회 또한 조금 더 섬세하게 구성되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우리는 기쁨이나 고통과 같이 도드라지는 특징에 근거해 사회를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아주 다양한 감정이 스며들어 있는 다층적이며 복합적인 경험과 믿음을 토대로 사회가 구축될 수도 있진 않을까? 이러한 생각 하나를 기업 장면으로 빌려 와 보면 기업 또한 비슷할 것 같다. 조직 구성원의 중첩을 뽑아내는 데 있어 고통이나 기쁨과 같이 극적인 자극만을 토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구성원의 다양한 경험이 공존할 수 있다면 조직 또한 조금 더 열려 있는 문화, 기쁨이나 고통과 같이 양극단에만 반응하는 것이 아닌 다양한 감정과 삶에 반응할 수 있는 너르고 깊은 조직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똘레랑스(관용; Tolerance)가 중요하다. 남의 경험을 견딜 수 있는 관용 말이다. 남의 경험이 나의 경험과 다름을 알고 그 다름에서 오는 괴리감을 견뎌낼 수 있는 관용, 그것이 바로 성숙함의 징표이자 필수 조건 아닐까? 관용적 개인이 많은 조직일 수록 조직은 성숙한 아름다움으로 빛난다. 성숙한 조직은 개인의 다양성이 공존할 수 있고, 다양성이 공존하는 조직은 더욱 다양한 가치를 사회에 전할 수 있다. 개인이든 기업이든 사회이든 똘레랑스, 관용이 필요한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