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안하는 아저씨? ‘미들⋅시니어’ 세대로 고민하는 기업 최근 몇년간 일본 HR 업계에 자주 등장하는 키워드 중 하나가 바로 ‘미들⋅시니어’다. ‘미들⋅시니어’로 총칭되는 세대는 40대60대의 중고년층 인구로, 미들 세대는 30대 후반50대 중반, 시니어 세대는 55세 이상으로 구분하기도 한다. 이미 일본 노동인구 중 미들⋅시니어의 비율은 약 57%를 차지하고 있다. '생산가능인구'라는 범위로 좁혔을 때 기업의 고령화는 사회보다 훨씬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일본 기업에서 ‘미들⋅시니어’가 문제로 대두되기 시작한 것은 약 10여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소위 단카이 세대라고 불리는 일본의 베이비 부머 세대는 버블 경제를 경험하며 풍요로운 시기를 보냈는데, 버블 붕괴 이후 잃어버린 30년을 거친 세대가 기업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된 것이다. 종신고용이라는 안정된 환경에서 연차가 쌓일수록 업무는 줄어들고 연봉이 높아지는 상사들을 보고 입사했으나 막상 본인이 그 연차가 되었을 때 직면한 현실은 녹록치 않았다. 성과주의 인사제도가 도입되어 자리잡아 가면서 연차가 높아진다고 해서 급여나 직책이 유지되던 시대는 끝났다. 후배들과 성과를 두고 경쟁해야 되는 상황에 놓인 것이다. 연차가 쌓이면 높은 자리에 오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버블 경기 끝자락에 대규모로 입사하다 보니 위로 올라갈수록 경쟁은 치열해졌다. 직책자 자리도 극소수로 한정되어 있을 뿐더러, 어렵게 맡은 직책자 자리도 일정한 연령에 이르면 내려놓아야 하는 ‘직책정년’이 보편적인 제도가 되어버렸다. 경영환경의 변화에 따라 기업의 사업 또는 업종도 빠르게 변화하여, 기존의 직무를 유지하지 못한 채로 직무 전환이나 조기퇴직을 강요받는 인원들이 생겨나기 일쑤였다. 이러한 제도 대부분이 미들⋅시니어를 타겟으로 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동기부여가 될 리가 없다. 위로는 베이비 부머 세대인 선배들에게 박탈감을 느끼고, 아래로는 후배들에게 기술적인 역량에서 뒤쳐지며 의욕을 잃은 미들⋅시니어에게 결국 ‘일 안 하는 아저씨’라는 별명까지 붙기에 이르렀다. 역피라미드형 인구구조를 가진 일본 기업 내에서 연봉은 비교적 높으나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는 미들⋅시니어는 여전히 조직 내에서 큰 문제로 자리잡고 있다. 문제 해결의 열쇠를 쥔 ‘미들⋅시니어’ 하지만 미들⋅시니어가 이렇게 부정적인 측면으로만 인식되는 것은 조직은 물론 본인에게도 큰 손실이다. 특히 수년째 인력난을 겪고 있는 기업 입장에서 이미 조직 내에 있는 미들⋅시니어의 잠재력을 끌어내지 못하는 것은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다. 미들⋅시니어에게는 그동안 쌓아온 업무 경험이 있고, 누구보다 회사를 위해 열정적으로 일했던 경험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런 의미에서 앞으로 기업의 경쟁력은 미들⋅시니어가 얼마나 활약하기 좋은 기업인지에 달려 있다. 이런 상황을 대변하듯 일본의 HR 업계에는 이미 발빠르게 움직이고 있는 회사들도 있었다. ‘미들⋅시니어’를 키워드로 검색을 해보면 업무 경험이 많은 미들⋅시니어를 전문으로 하는 채용 사이트, 교육 컨설팅 회사, 커리어 컨설팅 회사에서 올린 게시물이 다수 등장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이미 미들⋅시니어를 타겟으로 한 시장이 형성될 정도로 화제가 되고 있는 것이다. 고령화, 생산가능인구 감소, 인력난 등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열쇠는 바로 ‘미들⋅시니어’가 쥐고 있다. ‘미들⋅시니어’가 활약할 수 있는 회사 만들기 어떻게 하면 미들⋅시니어가 마음놓고 활약할 수 있는 회사를 만들 수 있을지, 일본 경제산업성(한국의 산업통상자원부, 중소기업벤처부에 해당)이 제안하는 기업의 인재전략을 통해 알아본다. 커리어 개발 - 커리어에 대해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기회 제공하기 미들⋅시니어가 활약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커리어에 대한 관점의 전환이다. 기존에는 조직이 만들어준 틀 안에서 시간이 지나면 수직적으로 상승하는 형태의 커리어가 지배적이었다면, 지금은 조직이 아니라 개인이 스스로 자신의 커리어에 대해 고민하고 커리어를 쌓아나가를 주체가 되는 것이 중요하다. 이를 커리어 자율, 커리어 자립이라고도 부른다. 개인의 성장이라는 차원에서 커리어를 바라본다면 새로운 지식/기술을 학습하고 업무 경험을 쌓는 데에도 적극적인 자세를 취하게 된다. 이는 조직 내에서 주어지는 상황 변화에 유연하게 대응할 수 있는 효과를 가져온다. 실제로 일본의 많은 기업들은 미들⋅시니어를 대상으로 커리어 개발 프로그램을 실시하고 있다. 일정 연령에 이른 구성원들은 커리어 개발 연수에 필수로 참가해야 하고, 1대1로 커리어 상담을 진행하는 곳도 많다. 커리어 개발이 일회성 연수나 이벤트에 끝나지 않기 위해 커리어 상담소를 설치하고 언제든지 주기적으로 커리어 상담을 받을 수 있도록 지원하는 곳도 있다. 일본의 대표적인 통신산업 회사인 NTT의 경우 ‘커리어 디자인 연수’에 참가한 후 1개월 후 ‘커리어 면담’을 실시하는 프로그램을 진행중이다. 특히 50세가 된 비직책자들은 더욱 철저하게 관리한다. NTT의 커리어 디자인에서 중점을 두고 있는 것은 평소에 하는 업무에 대해 자율성을 높이는 것, 그리고 인생 전체를 놓고 봤을 때 행복도를 높이는 커리어를 구축하는 것 이 2가지다. 이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과정에서 미들⋅시니어 인재들의 행동 변화를 이끌어 내고자 한다. 실제로 커리어 디자인을 통해 NTT는 행동변화율을 KPI로 설정하고 있기도 하다. 커리어 디자인 연수나 면담에 참가해서 커리어에 대한 의식만 변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실제 행동으로 이어지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후배와 적극적으로 소통한다’가 아니라 ‘후배들을 모아서 매월 셋째주 수요일에 세미나를 실시한다.’와 같이 구체적인 지표를 활용할 수 있도록 한다. 이뿐만 아니라 미들⋅시니어를 구성원으로 두고 있는 리더들에게는 팀원의 커리어를 관리하고, 그들의 변화를 관찰할 수 있는 커리어 관리 연수도 실시한다. 리텐션 강화 - 조직 내에서 활약을 촉진할 수 있는 장치 만들기 미들⋅시니어 중에서도 임금피크제를 선택하거나, 직책정년을 거쳐 직책을 내려놓은 인원들의 경우 금전적으로 제공할 수 있는 보상은 기존에 비해서 줄어들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들⋅시니어가 활약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기 위해서는 ‘조직에서 그 인재를 어떻게 활용하고 싶은가’에 대한 구체적인 요구사항이 있어야 한다. 어떤 이유로 회사가 본인을 필요로 하는지 명확하게 인식하게 되면 부서 이동이나 직책 변화에 대해서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활약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일본의 A호텔의 사례를 보면, 시스템 사용이나 기술을 활용하는 부분에서는 역량이 부족하지만 진상 고객을 대응하는 능력 만큼은 뛰어난 50, 60대 직원이 있었다. 고객을 직접 대면하고 클레임을 받는 것에 어려움을 느끼는 젊은 직원들 대신 미들⋅시니어 직원들을 고객 대응에 전면으로 내세우고, 실제 클레임 사례들은 사례집으로 정리하여 엮어 사내 교육에 활용한 전형적인 미들⋅시니어 활용 예라고 할 수 있다. 부동산 회사인 LIFULL의 경우, 2006년부터 사내에서 신규사업 제안 제도를 도입하여 100개 이상의 자회사를 설립해 나가고 있는 중이다. LIFULL은 신규사업의 아이디어로 시작하여 자회사가 되기까지의 과정에서 미들⋅시니어를 배치하여 활용해 왔다. 기존의 조직보다 규모는 작지만, 법인을 하나 설립하는 과정에는 그동안 쌓아온 경험과 노하우를 종합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기회가 된다. 아이디어는 있으나 업무 경험이 부족한 후배 사원들을 도와, 경영자의 시선에서 사업이 지속될 수 있도록 돕는다는 차원에서 미들⋅시니어들이 의욕적으로 바뀔 수 있었다. 또한 법인을 설립하고 수익을 내 보는 성공체험은 은퇴 후 창업을 목표로 하고 있는 미들⋅시니어들에게는 리스크가 적은 창업 시뮬레이션 기회가 될 수도 있다. 새로운 관계성의 구축 - 회사 밖으로도 시선을 넓히기 지금까지 미들⋅시니어들이 조직 내에서 커리어를 이어 나가는 방안을 고민했다면, 앞으로는 회사 밖으로도 시선을 돌릴 줄 알아야 한다. 사내로 제한을 두지 않고 회사 밖의 전혀 새로운 환경에 가서 자극도 받고, 새로운 것에 도전할 수 있는 경험을 쌓는 것도 중요하다. 그러다보니 미들⋅시니어를 대상으로 하는 연수 프로그램 중에는 ‘경계를 초월하는 학습’ 형태를 띄고 있는 것들도 많다. 의외로 기업을 벗어나면, 기업에서의 경험을 필요로 하는 다양한 조직들이 존재한다. 비영리 단체, 지방의 공공기관, 학교 등 기업 경험을 가진 베테랑의 노하우를 배우고 싶어 하는 곳도 많다. 이런 곳에 가서 지금까지 하던 일과 전혀 다른 프로젝트에 도전해 보면,그동안 쌓아온 경험이 얼마나 사회적으로 필요한 것이었는지 인식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 또한 미들⋅시니어들이 회사의 이름을 내걸고 프로보노 활동에 참여하거나, 사회공헌 활동에 참여하여 ESG 차원에서 성과를 내는 데 활약할 수 있도록 할 수도 있다. 책임감을 가지고 사회적으로 도움이 되는 업무를 해보는 과정에서 업무에 적극적으로 임하는 자세, 열정을 다시 한번 불태울 수 있기도 하다. 기업이라는 울타리 안에만 갇혀 있던 미들⋅시니어들이 더욱 더 적극적으로 조직 밖으로 눈을 돌릴 수 있도록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 필요하다. 회사 입장에서는 미들⋅시니어 직원이 회사에서 정해진 일을 시키기 위한 존재라고 생각하기 보다는, 회사의 이름을 내걸고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파트너라고 인식하고 새롭게 관계를 정립할 수 있어야 한다. 중요한 것은 신체 나이가 아닌 커리어 나이! 일본의 미들⋅시니어 세대에 대한 고민은 고령화 사회에서 기업이 ‘먼저 온 미래’를 경험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미들⋅시니어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들은 단순히 특정 연령대의 인원들만 경험하는 문제는 아닐 것이다. 곧 모든 일하는 사람들이 직면하게 될 문제를 미들⋅시니어가 먼저 경험하고 있는 것 뿐이다. 일본에서는 보통 미들⋅시니어 대상 커리어 교육 프로그램을 50대를 대상으로 실시하는데, 그때 교육을 받은 사람들의 공통적인 반응은 ‘왜 이 교육을 지금 받았는지 너무 아쉽다. 이 교육을 더 젊었을 때 받고 더 빨리 고민하고 준비했어야 했다.’라고 한다. 이제는 커리어 디자인 프로그램을 미들⋅시니어 대상만이 아니라 주니어 때부터 장기적인 프로젝트로 실시하는 기업들도 늘어나고 있다. 일본은 정년을 70세로 연장하거나, 60세 이상 시니어 인재들을 신규로 고용하는 것에 대해 제도적으로 권장하고 있는 추세다. 미들세대부터라도 자신의 커리어에 대해 고민하지 않으면 앞으로 어떻게 일을 하며 살아갈지에 대한 방향을 잃을 수 있다. 미들⋅시니어 활약을 위해 중요한 것은 결국 ‘커리어 자립’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연령대에 있더라도 자신의 인생에서 일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자신이 앞으로 어떤 일을 하게 될지 스스로 선택하면서 일한다면 조직 내에서 몇 살이 되더라도 활약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