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병하는 직장인, ‘비즈니스 케어러’의 등장 우리나라보다 앞서 고령화 사회를 경험하고 있는 일본에서 몇년 전부터 화두로 떠오르고 있는 것이 바로 ‘간병'이다. 육아를 하는 직장인들을 대상으로 ‘일과 가정의 양립’이라는 용어를 많이 쓰곤 하는데, 일본에서는 ‘일과 간병의 양립'이라는 용어가 더 많이 쓰이고 있는 실정이다. 일본 직장인 중 간병을 하고 있는 인원은 20년 사이에 약 2배로 증가하여 그 수만 70만명에 이른다. 일본의 베이비 부머 세대인 ‘단카이 세대'가 70세를 넘어서는 노령 인구가 되면서, 부모 세대의 간병을 자녀 세대인 40대~50대 직장인이 맡게 된 것이다. 자녀 세대는 외동이거나 형제가 적은 경우가 많아 그 부담은 점점 커지고 있다. 그 결과 간병을 이유로 퇴사를 하거나, 업무 부담이 적은 직장으로 이직을 하는 경우가 발생하며 일본 기업들에게 큰 위험으로 다가오고 있다. 특히, 간병으로 이탈하는 인력들이 조직 내에서 관리직을 맡고 있거나 핵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경우도 많기 때문에 기업 차원에서 체계적인 대응이 필요하다. 일본의 후생노동성(한국의 보건복지부에 해당)에서는 기업 차원에서 간병하는 구성원들을 잘 지원할 수 있도록 일과 간병의 양립을 위한 제도, 매뉴얼을 마련하고 대대적으로 홍보를 하고 있다. 육아와 다른 ‘간병’의 특성 간병은 여러모로 육아와 비슷하면서도 다른 특성을 보이는데, 이러한 특성으로 인해 막 육아를 마친 40~50대 본인에게는 물론 기업에도 큰 부담으로 다가온다. 우선, 육아의 경우 임신, 출산, 육아 기간이 어느 정도 정해져 있기 때문에 시기를 예상하고 준비할 수 있지만 간병은 언제 간병을 하게 될지 그 시기를 가늠할 수 없는 것이 가장 큰 문제다. 어느날 갑자기 부모님이 병에 걸리시거나 다치셔서 간병을 해야 하는 돌발적인 상황이 많기 때문에 예상하지 못한 시점에 인력 공백이 발생할 수 있다. 간병은 언제 시작해서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다는 점에서도 큰 부담이 된다. 발달 단계에 따라 예측 가능한 육아와 달리 시작은 물론 종료 시점도 예측할 수 없다는 점이 가장 큰 불안 요소로 꼽힌다. 또한 간병은 당사자에게 심리적인 충격이 크다. 출산과 육아 과정에서도 물론 심리적인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 기쁜 일로 받아 들이고 그 과정을 극복해 가곤 한다. 반면, 가족의 병환에 대해서는 본인이 받는 충격은 큰 데 비해서 주변에 의논하거나 얘기를 꺼내는 것조차 어려워 하는 경우가 많다. 간병으로 인해 겪고 있는 어려움에 대해 회사에 이야기를 했다가 부정적인 영향이 있을까 두려워 하기도 하고, 어떻게든 스스로 해결해보려고 하다가 더 큰 어려움을 겪기도 한다. 일과 간병의 양립을 위한 기업 차원의 대응 모델 이처럼 간병은 예측 불가능하고, 주변에 공표하기 어려운 특성을 가진 만큼 기업에서는 더 세심하게 대비하고 관리할 필요가 있다. 또한, 누가 언제 간병을 해야 하는 상황에 놓일지 모르기 때문에, 전 구성원을 대상으로 일과 간병에 대한 제도를 알리고 적극적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하는 것도 중요하다. 후생노동성은 기업이 일과 간병의 양립을 위해 다음과 같은 모델에 따라 대응할 것을 제안하고 있다. 실태 조사 일과 간병 양립 제도 마련을 위해 가장 먼저 선행되어야 하는 것은 바로 실태 조사이다. 구성원 중에 이미 간병을 맡고 있는 사람이 어느정도 있는지, 간병에 대한 불안감은 어느정도 되는지, 간병을 하게 되었을 때 활용할 수 있는 제도에 대해 알고 있는지, 어떤 지원이 필요한지 등 간병 실태에 대해 설문/인터뷰를 통해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제도 설계 간병에 대한 실태 조사를 하고 나서는 구체적인 제도를 마련해야 한다. 간병휴직, 상담창구 마련 등 기본적인 제도를 활용하기 위한 이용 조건이 까다롭지 않은지 검토하고, 정부 및 지자체에서 받을 수 있는 지원에 대해서도 파악하고 연계할 수 있어야 한다. 법적으로 보장되어 있는 제도 외에도 기업의 특성에 따라 추가적으로 지원할 수 있는 사항이 있는지도 살펴 보아야 한다. 실제로 많은 기업들이 주 4일제 근무 등 근무 시간의 조정, 재택근무, 귀성 교통비 지원, 가사 도우미 비용 지원 등 간병의 부담을 줄이기 위한 다양한 지원을 하고 있었다. 간병을 맡기 전인 구성원에 대한 지원 간병은 언제 일어날지 예측할 수 없는 만큼 아직 간병을 맡기 전인 구성원에 대해 사전에 제도에 대해 충분히 알리고, 회사를 떠나지 않고도 충분히 간병이 가능하다는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를 위해, 간병을 맡게 되었을 때 어떤 절차에 따라 움직여야 하는지 지속적인 홍보와 연수를 통해 구성원들에게 숙지시켜야 한다. 기업에 따라서는 별도의 상담 창구를 마련하는 곳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 대부분 팀장이 간병에 대한 첫 상담을 맡게 되기 때문에, 팀장을 대상으로 간병을 맡은 구성원의 상담을 어떻게 진행하는지 교육하는 것도 필요하다. 간병을 맡고 있는 구성원에 대한 지원 이미 간병을 맡고 있는 구성원에 대해서는 간병 지원 제도를 잘 활용하고 있는지 점검하고, 추가적인 지원이 가능한 부분이 있다면 지원해 주어야 한다. 간병을 맡고 있지만 회사에 말하지 못하는 구성원이 있다면, 이들을 찾아내서 제도를 활용할 수 있도록 하는 것도 필요하다. 추가적으로, 간병으로 인해 심리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는 구성원에게는 심리상담을 제공하는 것도 도움이 된다. 일하는 방식 개혁 우선 간병으로 인해 업무 시간 혹은 공간의 제약이 있는 구성원에게는 유연근무제, 원격근무 등 제도적으로 필요한 지원을 해주는 것이 필요하다. 하지만 시간과 공간의 제약이 어느 정도 해결된 후에는, 간병을 하면서도 구성원이 의욕을 가지고 업무에 몰입할 수 있게 업무의 질을 높이기 위한 방안을 마련하는 것도 중요하다. 불필요한 회의와 보고서를 줄이고, 시스템을 활용해서 언제든지 업무 공유가 가능하도록 하는 것 등 일하는 방식을 개혁해 나간다면 간병 뿐 아니라 조직 내 구성원들이 겪는 다양한 종류의 어려움을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고령화 시대, 돌봄 쇼크에 대비하기 2024년 트렌드 예측에서도 ‘돌봄'은 중요한 키워드로 꼽히고 있다. 과거에는 가정 혹은 여성의 일이라고만 여겨지던 돌봄을 이제는 사회 전체가 함께 맡아야 하는 상황이 왔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일본은 이미 고령화가 어느 정도 진행되어 간병이 사회 문제로 대두된 지 오래 되었지만, 한국은 아직 육아에 비해 간병에 대해 대비하는 제도가 미비한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고령화 속도가 전세계 어느 나라보다 빠른 한국의 상황을 비추어 보아, 조만간 육아휴직보다 간병휴직을 쓰는 인원이 더 많아지는 날이 곧 다가 오리라고 본다. 일본의 간병휴직 제도를 살펴보면서 인상적이었던 것은, 휴직 기간 동안 본인이 직접 간병을 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제도를 활용해서 본인이 없어도 간병이 가능한 시스템을 구축하는 기간으로 활용하도록 한다는 점이었다. 지극히 사적인 영역이라 생각되던 간병을 공적인 영역으로 끌어내어 지역사회, 기업이 함께 해결하려 노력하고, 이를 통해 구성원들은 업무에 몰입하고 커리어를 이어나갈 수 있게 하는 것이 돌봄 쇼크에 대비하기 위한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