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연말, 연초가 되면 다양한 업계에서 트렌드를 파악하고자 하는 바람이 불곤 한다. 트렌드라는 것은 어쩌면 그때 그때 유행처럼 지나갈 수도 있지만, 그 사회가 지금 당면하고 있는 문제를 보여주는 거울이기도 하기 때문에 어떤 키워드가 등장하는지는 알아둘 필요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일본의 HR 트렌드를 살펴보는 것은 한국보다 조금 일찍 겪고 있는 사회 문제나 이슈들에 대해 기업이 어떤 대응을 하고 있는지 미리 엿볼 수 있는 좋은 기회다. 이번 글에서는 일본의 HR 컨설팅 회사인 P 모 연구소가 발표한 자료를 바탕으로 2023년과 2024년을 관통하는 일본의 HR 트렌드 키워드 3가지를 다뤄보고자 한다. 임금 인상일본에서 ‘임금 인상’이 HR트렌드의 첫번째 키워드로 제시된 이유는 바로 30년 만에 이루어진 임금 인상이기 때문이다. ‘잃어버린 30년’이라고 불리는 기간 동안 디플레이션을 경험해 온 일본의 경우 임금 인상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다. 일본 경단련의 조사에 따르면 2023년, 대기업의 임금인상률은 3.99%로 그동안 가장 높은 인상률이었던 1993년 3.86%를 30년 만에 뛰어넘었다.임금 인상이 사회적 이슈로 떠오른 것은 정부의 입김이 컸다. 기시다 총리가 ‘새로운 자본주의’를 내걸고 2023년 국회에서 ‘기업이 수익을 내고, 노동자에게 그 성과를 제대로 배분하여 소비를 늘리고 경제성장을 이룬다. 이 선순환이 임금 인상이다.’라고 발표했던 것이 기업에 큰 영향을 미쳤다. 2023년에 시작된 임금 인상 붐은 2024년에도 계속해서 이어질 예정이다.하지만 30년 만의 대대적인 임금 인상에도 불구하고 실질 임금 인상률은 크게 높지 않다. 그동안 오르지 않았던 일본의 생활 물가도 점점 오르기 시작하여 임금이 인상되어도 실제로는 임금이 내려간 것과 같은 효과가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재계에서는 경제성장을 위해서는 물가 상승률에 따른 현실적인 임금 인상도 필요하지만, 일하는 방식 개혁을 동반한 생산성을 높이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후생노동성의 조사 결과, 과거 25년 간 노동생산성 (실질 GDP 맨아워 기준) 의 평균상승률은 미국이 1.7%, 한국이 4.2%인데 반해 일본은 1.3%에 그쳤다. 그만큼 야근과 잔업이 뿌리깊게 자리잡고 있기 때문에, 근무 시간을 효율적으로 활용하면서도 업무 생산성을 높여서 기업의 성과를 높일 필요가 있다. 기업은 이러한 배경에서 유연한 근무 제도를 확대해 나가고 있으며, 근무 시간뿐 아니라 공간에서도 자유로운 일하는 방식을 만들어 가고자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리스킬링리스킬링 역시 기업뿐 아니라 정부 차원에서 추진하고 있는 정책 중 하나다. 기시다 총리가 2023년 여름, ‘닛케이 리스킬링 서밋 2023’에서 일본형 직무급의 도입, 성장 산업의 원활한 노동력 이동을 위해 ‘삼위일체의 노동시장 개혁’이 필요하다고 발표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이를 위해 민관이 협동하여 리스킬링을 적극적으로 추진할 것을 강조하였고, 실제로 일본 정부는 2022년부터 5년 간 리스킬링 지원을 위해 1조엔을 투자할 예정이다.특히 리스킬링 중에서도 인공지능(AI)과 디지털 분야의 인재를 확대하기 위해 별도의 비용을 조성하여 지원하고 있으며, 리스킬링을 통해 재취업에 성공한 경우 교육비를 최대 56만엔까지 지원하는 등 다양한 유인책을 제시하고 있다. 인력부족과 IT 사업을 이끌어 나갈 인재가 부족한 일본의 경우 리스킬링은 선택이 아닌 필수이며, 2023년을 ‘리스킬링 원년’이라고 보고 있다.기업 역시 인재 육성 차원에서 리크실링 프로그램을 적극적으로 도입하고 있다. ANA그룹의 경우 50~58세 시니어 직원들을 대상으로 리스킬링 프로그램을 도입하여 디지털 교육은 물론 회계사 자격 취득까지 다양한 분야의 역량 개발을 지원하고 있다. 삿포로 맥주로 유명한 삿포로 그룹은 2022년부터 ‘전 사원의 DX인재화’를 내걸고, 국내 그룹사 직원 6000명을 대상으로 디지털 분야 리스킬링 교육을 실시하고 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리스킬링 교육을 받아본 경험이 있는 사람은 취업 (재취업) 준비생 중 약 30%, 디지털 분야 리스킬링 교육 경험자는 약 20%로 낮은 상태다. 디지털, AI 등 IT 분야의 발전에서 뒤쳐지고 있는 일본의 경우 DX 관련 분야에서 일할 수 있는 인재를 필요로 하고 있으나, 경쟁 국가들과 점점 차이가 벌어지고 있는 상황이다 보니 정부 차원에서 나서서 리스킬링을 밀어붙이고 있는 모양새다.2020년 다보스 포럼이 ‘리스킬링 혁명 (Reskilling Revolution)’을 테마로 내세우고 ‘2030년까지 지구 인구 중 10억인을 리스킬링한다’고 발표할 정도로 리스킬링은 이미 세계적인 화두가 되었다. 효과적인 리스킬링을 위해서는 직업 훈련 또는 평생 교육 차원에서 학습 기회를 제공하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커리어 패스와 연계된 실질적인 교육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인재확보경쟁 심화일본 기업의 경우 약 10년 이상 구인난에 시달리고 있으나, 2023년은 특히 더 인재확보경쟁이 심했던 한 해였다. 기업이 장기간 구인난을 겪어왔음에도 불구하고 현 시점에서 ‘인재확보경쟁’이 HR 키워드로 제시되는 것은, 지금의 인력 부족 문제가 단순히 경기 사이클에 의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그동안은 경기가 좋을 때 인력을 많이 채용하고, 경기가 나빠지면 채용을 동결하면서 인재확보는 어느정도 경기 사이클과 연동되는 것으로 인식되었었다. 하지만 지금은 경기와 상관없이 복잡 다양한 요인에 의해 인력 부족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그동안 누적되어 온 사회,경제적 문제들이 2023년에 ‘인력부족’으로 나타난 것이다. 고령화로 인한 생산 연령 인구 감소, 잃어버린 30년 이후 경기 반등, 코로나 이후 경기 회복 등이 그 원인이다.특히 일본은 생산 연령 인구 감소 비율이 총 인구 감소 비율보다 높아질 것으로 예측되고 있다. 즉, 총 인구가 줄어서 수요가 줄어든다고 해도 노동력 공급이 여전히 그 수요를 따라가지 못해서 경제 성장이 정체된다는 것이다. 게다가 일본은 기존의 경제성상을 이끌어온 중화학공업에서 IT 산업으로의 전환을 제대로 이루어내지 못한 상태다. ‘인구감소’와 ‘경쟁우위 산업의 부재’라는 이중고를 겪고 있는 셈이다.전문가들은 이러한 인재확보경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기업이 인적자본에 대해 투명한 정보공개를 할 것을 제안하고 있다. 기업의 입장에서 인재확보를 위해 필요한 것만 주장할 것이 아니라, 구직자의 시점에서 필요한 정보들을 제공해야 Right People을 채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때로는 기업에 불리할 수 있는 정보들까지 얼마나 투명하게 공개할 수 있는가가 그 기업의 경쟁력을 높일 수 있으며, 이는 구직자뿐 아니라 ESG 차원에서 다양한 이해관계자들에게도 신뢰를 높일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일본의 2024년 HR 트렌드를 살펴 보면서 처음에는 특별한 키워드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자세히 들여다 보니 그 이면에 있는 사회적 배경들을 파악할 수 있어서 유의미한 시간이었다. 임금 인상과 더불어 노동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다양한 방식의 근무 제도를 도입하고 실험해 보고 있는 기업, 리스킬링을 통해 인력 부족 문제은 물론 신사업에 필요한 인재 확보를 동시에 해결하는 기업, 인재확보를 위해 고군분투하는 기업들의 사례를 보며 한국도 머지 않아 겪게 될 문제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볼 수 있었다. 특히 일본과 비슷하거나 더 빠르게 고령화와 저출산 문제가 진행되고 있는 한국의 경우 ‘인구 문제’에 대해 더 관심을 기울여야 될 것으로 보인다. 일본에서는 65세 이상 노인 인구가 일본 총 인구의 30% 이상을 차지하게 되는 2030년의 사회적 문제를 ‘2030년 문제’라고 총칭하며, 이를 대비하기 위해 정부, 기업이 다양한 정책을 고민하고 있다. 인구 감소에 대비하여 HR은 물론 사업 측면에서도 미리 대응책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